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21) 주님의 임재 앞에서

기독교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21) 주님의 임재 앞에서 <사무엘하 6:12~19>

믿는 자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아니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대부분 다 알고 있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이 이야기의 핵심은 단순합니다. “다윗은 객관적인 전력으로 봐서는 골리앗에게 100프로, 아니 만 프로 질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일개 목동에 불과한 다윗이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세움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다윗은 이러한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있는 자신의 모습을 고백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들이는 모습입니다. 법궤는 길이가 1.2미터 조금 안되고, 너비와 높이가 60센티미터 조금 넘는 직사각형 모양입니다. 그 안에는 십계명 돌판과 만나가 담긴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담겨 있었습니다. 십계명 돌판은 하나님께서 택함받은 백성들에게 계명을 주신 것을, 만나가 담긴 항아리는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의 삶의 모든 필요를 공급해주심을, 또한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하나님께서 지팡이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보호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법궤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택함 받은 백성의 삶에 임재하시고, 저들의 삶을 주관하심을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언제나 주의 임재 앞에 서있기를 원했던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의 왕에 오르자마자, 하나님의 법궤를 자신의 성으로 모셔들입니다. 그 앞에 춤추어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주님의 임재 앞에서” 우리는 어떠한 모습으로 서야 할 것인가? 함께 다윗의 모습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 날마다 주님의 임재 앞에 한 걸음 더 다가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번째로, 전심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다윗은 언제나 승승장구했습니다. 계획한 것, 뜻한 모든 것을 이루지 못함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으니, 하나님의 법궤가 방치되어있다시피 한 것입니다. 다윗은 즉시로 법궤를 성 안으로 모셔들이고자 합니다. 법궤를 실은 수레가 나곤 타작마당에 들어올 때에, 갑자기 소들이 뛰어서 법궤가 떨어지려 합니다. 웃사는 다급하게 손을 내밀어 법궤를 붙잡다가는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에 다윗은 두려움으로 말합니다.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웃사는 법궤에 손을 대었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누군가는 말할지 모릅니다. “그럼, 법궤가 떨어지게 생겼는데, 그랬다가 박살이 날지도 모르는데, 그걸 그냥 두었어야 합니까?” 아닙니다. 문제는 여기부터가 아닙니다. 아비나답 제사장의 아들 웃사가 법궤를 어깨에 메는 대신 수레에 실었다는 것, 그걸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법궤를 운반할 때는, 반드시 레위인중에서도 고핫자손이 어깨에 메고 운반해야 합니다. 법궤는 하나님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거룩한 물품입니다. 하지만 웃사는 법궤를 하나의 물건 취급했습니다. 주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 앞에서 예배자가 되지 못하고, 법궤를 운반하는 관리자가 된 것입니다.

  

반면에 다윗은 어떤가요? 다윗은 주님의 임재 앞에 예배자의 모습으로 엎드립니다. 13절에 보니까, “여호와의 궤를 맨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립니다.” 한 번이 아닙니다. 매 번 여섯 걸음을 갈 때마다, 마지막 일곱 걸음을 앞두고 계속해서 소와 송아지를 잡아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얼마나 많은 소와 송아지가 필요했을까요? 주의 임재 앞에서 전심을 드리는 거예요. 또한 다윗은 법궤가 들어올 때에 힘을 다하여 춤을 춥니다. 21절 마지막에 다윗은 미갈에게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하나님 앞에서만큼 마치 어린 아이처럼 춤 추며, 재롱 떨며 주님만을 높여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주님 앞에 예배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임재 앞에서,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어떠한 자세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습니까? 언제나 주님의 임재 앞에서 오늘 다윗처럼 전심으로 예배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다윗의 1차 법궤 운반은 실패했습니다. 3개월이 지났을즈음에 다윗은 한 보고를 받게 되죠. 본문 12절입니다. “왕이시여!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이 임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12절 후반부에 이런 말씀이 이어지죠.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다윗은 다시금 기쁨으로 하나님의 궤를 모셔들입니다. 다윗의 기쁨을 아주 잘 표현한 것이 14절 말씀입니다.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얼마나 기뻤는지, 왕이 백성들이 다 보는 앞에서 열심히 춤을 춥니다. 그냥 어깨를 들썩이는 정도의 덩실덩실 추는 그런 춤이 아닙니다. 본문을 보면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히브리어 원어로 하면 “메카르케르”라고 합니다. 메카르케르는 “뛰면서 빙빙 돌면서 추는 춤”을 뜻합니다. 우리나라 민속춤으로 보면 상모돌리기 수준이라고 보면 됩니다. 아니면 비보잉댄스정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속살이 드러날 정도가 되는 거죠. 이어서 15절을 보십시오.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다윗 혼자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신실한 믿음의 백성들은 지금까지 약 30년간이나 방치되어 있다시피한 법궤를 계속해서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법궤를 모셔들이는 기쁨을 모두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16절에 보면 기뻐하지 않는 한 사람이 보입니다. 누구인가요? 사울의 딸이자, 지금 현재 다윗의 아내인 미갈입니다. 가장 불쌍한 한 사람입니다. 다함께 기뻐하는데, 혼자만 “앙~~” 이를 앙다물고 못마땅해 합니다. 다윗은 법궤를 모셔들인 후에, 하나님께 다시 한 번 예배를 드립니다. 이어서 19절에 보면 모든 백성들에게 떡 한 덩이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를 나누어 줍니다. 그야말로 잔치입니다. 

  

미갈은 웃사와 함께 법궤를 운반하는 수레 옆에 서있었으면 잘 어울렸을지도 모릅니다. 근엄하게, 법궤의 관리자로서 고상한 미소를 띄면서 걸어가는 웃사,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죽은 것과 같았던 웃사와 전혀 다를바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 앞에서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데, 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까? 다윗은 늘 그러한 감사와 기쁨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뉴질랜드광림에 속한 모든 성도님들은 함께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으로 한 형제 한 자매된 우리들은 나라와 민족과 인종을 넘어서서 모두 다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임재 앞에서 함께 기뻐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준비된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시는 그 날에 대한 비유 세 가지가 나옵니다.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공통적인 것은 삶 속에서 준비된 삶이 있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였습니다. 다윗은 처음에 법궤를 모셔들이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왜 실패했을까요?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윗은 1차 법궤 이송 작전에서도 3만명이라는 엄청난 인원을 준비했습니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 수레도 준비했습니다. 연주하는 이들도 준비시켰고,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철저하게 다 갖추었습니다. 그럼에도 실패한 이유는 하나입니다.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에. 모든 것은 다 충분합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부족한 게 있었죠. 신앙적인 준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율법에 따르면, 하나님의 법궤는 제사장이 어깨에 직접 메야만 합니다. 다윗이나 다른 제사장이 이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법궤를 수레에 싣고 오는 방법을 택했을까요? 사무엘상 6장에 보면 한때 블레셋에 빼앗겼던 법궤를 블레셋이 이스라엘에 다시 돌려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때 블레셋 사람들은 새 수레에 법궤를 실어서 아직 젖나는 암소가 끌게 하여 이스라엘 진영으로 보냈습니다. 그 때는 수레에 실어도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블레셋이잖아요. 율법에 문외한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그대로 따라한 것입니다. 신앙적인 준비가 부족했던 거죠. 우리도 때로는 그럴 때가 있습니다. 행사적인 준비는 완벽한데, 신앙적인 준비는 부족할 때가 있다는 거예요. 예배의 자리에서는 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오늘 다윗이 힘을 다하여 춤 추며 찬양한 것처럼, 기쁨으로 주님을 찬양하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주님의 임재 앞에 서는 그날까지 언제나 준비된 삶을 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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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일요시사님에 의해 2021-09-17 15:49:58 교민뉴스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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