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33); 사랑하는 자여!

기독교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33); 사랑하는 자여! <요한삼서 1:1~15>


도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 받는 제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세 편의 서신을 기록했는데, 요한일서, 이서, 삼서입니다. 오늘 요한삼서는 가이오만을 향한 지극히 개인적인 서신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요한은 가이오를 향해서 특별한 사랑을 표현합니다. 이를 통해 볼 때, 가이오는 사도 요한에게 영적인 아들과도 같은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의 가이오를 향한 특별한 사랑의 표현은 1절에 “사랑하는 가이오”,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라는 말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만 해도 그 사랑을 짐작할 수 있으련만, 2절에 이르러서는 더욱 더 그 사랑의 절정에 이릅니다. “사랑하는 자여!”, 이후에 5절에도 11절에도 한 번 더 언급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가이오라는 이름은 “기쁨, 환희”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당시에 아주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가이오가 어떤 인물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가이오가 사도 요한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는 것이고, 더불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역시 가이오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신앙인의 모습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이오와 같은, 또한 성도들간에도 가이오와 같은, 우리 가족들간에도,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가이오와 같은, 그 이름 뜻처럼 “기쁨과 환희”을 줄 수 있는, “사랑하는 자여!”라고 불리울만한 모습을 가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또한 성도들간에도, 세상 속에서도 “사랑하는 자여!”라고 불리움을 받기에 합당한 모습은 무엇인가? 더불어 “사랑하는 자여!”라고 불리움을 받는 자가 받아 누릴 축복은 또한 무엇인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영혼이 잘 되는 복을 누립니다. 


본문 2절의 말씀은 아마 우리 성도님들이 아주 잘 아시는 말씀일 것입니다. 우리 한 번 같이 읽어볼까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세 가지 축복을 선언합니다.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강건케 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복 중에 가장 귀한 복이 무엇인가요? “영혼이 잘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 되는 것이 전제 조건입니다. 영혼이 잘 되면 범사에 잘 되는 것도, 강건한 것도 다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혼이 잘 되는 것이 무엇인가요?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십니다. 그리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십니다. 그러자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자기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형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기가 우리 인간에게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혼이 우리 안에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믿는 자로서 살아갈 때에, 삶의 축복도 누려야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복을 받아 누림에 있어서의 전제조건이 언제나 명확하죠. “네가 네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임하리니.” 반드시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이루어져야, 그 모든 삶의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이 육적인 복을 먼저 향하게 되는 순간, 삶의 풍요만을 바라보는 순간, 세상의 물질과 소유와 육적인 건강만을 추구하기 시작하는 순간, 내 영혼은 병들기 시작합니다. 영혼이 잘 되면, 범사가 잘 됩니다. 범사가 뭔가요? 사전에 딱 이렇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모든 일”. 영혼이 잘 되면, 모든 일이 잘 된다는 거예요. 늘 기억하십시오. 내 안에는 하나님의 숨이 담겨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혼이 있다. 언제나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며,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삶을 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언제나 주의 진리 안에 거합니다. 


본문에 사도 요한은 가이오를 향해서 “사랑하는 가이오”라고 부르고, 바로 이어서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이 부분이 “엔 알레테이아”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해석하면 “진리 안에서”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도 “in truth”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냥 한글로만 보면, “참으로 - 내가 정말 가이오를 사랑한다.”라는 뜻으로 보이지만, 정확하게 원문을 따르면 “내가 진리 가운데 사랑하는 자”라고 해야 합니다. 이 말은 사도 요한도, 가이오도, 모두 진리를 붙잡고, 진리를 따라 살고, 진리 안에 거하고, 진리 안에 행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따르는 자입니다. 진리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오늘 가이오가 “사랑하는 자여!”라고 불리울 수 있었던 것은, 진리 가운데서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요한은 가이오를 향해 앞서 말씀드린대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자”라고도 부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삼서를 기록할 당시 나이를 약 90세 정도로 봅니다. 그 노년의 나이에 자신의 아들과도 같은 가이오를 향해서 “사랑하는 자여!” 전심으로 칭찬하며 격려하는 이유는 단 하나, 가이오가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로 언제나 변함없이 진리 가운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이단세력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두 가지 이단이 있었어요. 하나는 악의적으로 잘못된 복음을 전하는 그야말로 이단이 있었고, 또 하나는 잘 몰라서 잘못 가르쳐 이단이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의도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둘 다 문제입니다. 바른 길을 걷는 자들을 실족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요한은 끝까지 강조합니다. “진리 가운데 거하라.” 요한일서에서도 진리를 강조하고, 요한이서에도 진리에 대해 보충합니다. 그리고 오늘 요한삼서에 가이오가 진리 가운데 거하고 있음을 보면서 기뻐하고, 가이오가 진리 가운데 행하고 있다는 증언을 받아 기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랑하는 자여!”라는 이름으로 당당히 불려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진리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진리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끝까지!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 진리 안에 거하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누구에게나 선한 증언을 받습니다. 


요한삼서의 주인공은 요한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가이오입니다. 요한은 이제 거의 죽음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영적인 아들과도 같은 가이오를 향해 칭찬의 말을 함과 더불어서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그 내용이 본문 5절에서 8절까지 나옵니다. 내용을 보면, 한 마디로 “성도들간의 사랑의 교제와 섬김과 나눔”에 대한 말씀입니다. 

  

초대교회는 예루살렘교회로부터 시작됩니다. 하지만 당시에 교회에는 영적인 지도자로의 역할을 감당할만한 인물들이 많이 부족했습니다. 그렇기에 여러 순회 전도자들이 교회를 방문해서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교회 내에서 이런 순회 전도자들이 오면, 잘 섬기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교회도 있습니다. 같은 교회 내에서도 섬기는데 앞장서는 성도들이 있는가 하면, “왜 우리가 저들을 섬겨야 하느냐?”면서 반대하는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이에 사도요한은 가이오에게 말합니다. “함께 동역하는 그리스도인들간에 서로 잘 섬기고 대접해야 한다.” “서로 떨어져 있는 교회들이 서로 돕고 협력해야 한다.” 내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안에 거하고, 믿음의 삶을 걸어가고 있다면, 나 혼자만, 우리 교회만, 우리끼리만 잘 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서로 협력하고 돕고 섬겨야 함을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사도 요한은 두 명의 인물을 소개합니다. 9절에 등장하는 “디오드레베”와 12절에 나오는 “데메드리오”입니다. 교회 내에 존재하는 두 부류의 사람입니다. 이름으로 보면 거의 비슷합니다. 그런데 성품과 삶의 모습이 완전 극과 극입니다. 먼저 디오드레베는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자입니다. 반면에 데메드리오는 많은 사람에게 선한 증거를 받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두 사람을 실 예로 들어가면서 11절에 이렇게 선언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하나님 앞에서나, 성도들간에나, 세상에서 대하는 모든 사람들 누구에게나 선한 증언을 받을만한 삶을 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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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일요시사님에 의해 2021-09-17 15:55:15 교민뉴스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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