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시 46편) - 광림교회 정존수 목사
어느 목사님이 미국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대여섯 살 정도 된 예쁘게 생긴 여자아이가 비행기 기내를 행복하게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아주 활달해서, 비행기 복도에서 춤을 추기도 하고 사람들을 쳐다보고 심지어는 만져 보기도 했습니다. 순식간에 이 아이는 비행기 안의 마스코트가 되어서 승객들의 귀여움을 받았습니다. 아이는 너무나 행복한 나머지 엄마, 아빠도 잊어버린 채 다른 승객들과 웃기도 하고 이야기도 하며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명랑하던 아이가, 순간 비행 기류가 이상해지고 비행기가 흔들리기 시작하니까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려갔습니다. 어디인가 보니까 바로 엄마의 품이었습니다. 위급한 순간이 되어서 아이에게 가장 먼저 생각난 곳이 바로 엄마의 품이었던 것입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다가 내 힘으로 감당하기 힘들고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달려갈 품이 있다면, 복된 사람입니다. 살아가는 것이 아무리 힘들어도 나의 모든 문제와 어려움을 내려놓을 수 있고 내 영혼이 안길 수 있는 피난처가 있다면 좌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1절 말씀에는 인생의 풍랑과 환난을 겪는 현대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세가지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는 피난처요, 두 번째는 힘이요, 세 번째는 큰 도움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핵심은 우리 인생에서, 누가 과연 피난처가 될 것이고, 힘이 될 것이고, 도움이 될 것인가?입니다. 사람은 이 질문에 답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 되시고,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길은 무엇인지 몇 가지로 은혜 나누길 원합니다.
1. 성도는 그럴지라도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셀라)(시46:2-3)” 오늘 본문 앞절에는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리고, 바닷물이 솟아나는 인간이 감당못할 일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현상의 변화가 아닌, 우리 인생의 문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믿었던 것이 흔들리고, 어려운 문제가 찾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시편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뭡니까? 후반절에 나오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땅이 변하고, 산이 변하고, 바다가 “변하기 때문에”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지라도” 나는 흔들리지 않겠다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미국의 시카고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전 시가지를 불바다로 만들었습니다. 마침 도시 중심에 있던 무디 목사님의 교회도 불에 타서 더 이상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한 기자가 얄밉게 무디 목사님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평소에 목사님께서는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사랑한다고 설교하시고, 어떤 위험에서도 구해 주신다고 말씀하셨는데 교회가 이렇게 불에 탄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곰곰이 듣던 무디 목사님은 "사실 우리 교회는 성도가 많이 모여서 하나님께 더 큰 건물을 짓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중이었는데 이렇게 잿더미가 되었으니, 이젠 교회를 더 크게 짓는 일만 남은 셈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아니 그러면 교회를 지을 돈은 충분히 모아 놓으셨습니까?" 그러자 무디 목사님은 오른손에 꼭 잡고 있던 낡은 성경책을 보이며 "여기 이렇게 하나님의 금고가 있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무디의 말을 어리석게 보았지만, 그 후, 무디 목사님을 통해서 영국 전역에 큰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영국교회 성도들의 헌금이 모아져서, 그 시카고의 불탄 교회 자리에 더 큰 예배당을 지어 하나님께 봉헌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신앙은 무엇입니까? 흔들리고 두려워하고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때로는 내 삶의 터전이 사라지고 없어졌을지라도 무디 목사님처럼,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2. 성도는 한 시내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한 시내의 삶이란 4절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4절에 보면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한 시내는 고요하고 평온하게 흘러갑니다. 앞의 2-3절에는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리고, 바닷물이 솟아나며 요란함과 혼돈이 가득했지만, 한 시내는 고요하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이 한 시내는 바로 성도의 삶을 의미합니다. 세상이 난리일지라도, 하나님의 주신 평온함을 잃지 않는 것이 바로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미국의 대통령 가운데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소련의 총리였던 후르시초프를 초청한 적이 있는데, 주일이 되어서 후루시초프 총리에게 오늘은 주일이니 나와 함께 교회에 가자고 청했습니다. 후르시초프가 거절을 했더니 아이젠하워는 한 시간 반만 기다려달라며 예배를 드리고 왔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나서 아이젠하워가 물었습니다. “한 시간 반동안 무엇을 하셨습니까?” 후르시초프는 “내가 먼 길을 찾아왔는데도 교회에 가야만 하는 당신의 핑계가 무엇일지 생각했소”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소련의 총리를 초청해 놓고 기다리게 하는 것은 큰 결례요, 자칫하면, 회담이 결렬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아이젠하워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믿음을 실천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을 가질 때, 그것이 세상의 모든 풍랑과 환난 속에서도, 한 시내처럼 평온하게 흐르는 복된 삶을 소유하는 되는 것입니다.
3. 성도는 가만히 있어 그가 하나님 되심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인간이 자주, 실수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는 어려움이 찾아오고 위기가 오면 바빠집니다. 허둥대고, 시끄러워지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46:10)”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어려움이 올수록, 환난이 클수록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움직이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허둥대지 말고, 더 침착하게, 더 간절하게 하나님께 대한 나의 자세를 견고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하나님의 하나님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사해는 염도가 매우 높아서 인체가 가라앉지 않습니다. 그래서 위험하지 않을 것 같지만 물에 들어갈 때 꼭 지켜야 할 안전수칙이 존재합니다. 절대로 헤엄을 쳐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사해 물은 다량의 광물질을 함유하고 있어 눈에 들어가면 몹시 아프기 때문입니다. 수영을 한다고 첨벙거리다가는 자신은 물론 옆에 있는 사람까지도 해를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해 물에 들어갈 때 가장 중요한 수칙이 힘을 빼고 가만히 바닷물에 몸을 맡기는 것입니다.
세상이 요동치고 환난이 클수록 우리는 허둥대면 안됩니다. 힘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힘을 빼야 합니다. 교만의 힘을 빼야 합니다. 불평의 힘을 빼야 합니다. 혈기의 힘을 빼야 합니다. 힘을 빼고 오직 하나님만 바랄 때 하나님이 비로소 하나님됨을 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