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땅처럼 요단을 건너는 신앙, 수 3:14-17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와 확연히 다른 것은 내가 믿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격적인 교제 속에서 우리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 은혜를 경험하면 “야 하나님 정말 대단하시구나.”라는 고백이 나오는데, 그 중 놀라운 은혜는 요단을 마른 땅처럼 건너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와 광야 40년을 마치고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요단강을 건너는 장면입니다. 이때는 우기여서 강이 넘치고 범람하여 홍수가 나는 시기였습니다. 백성들이 건너기에 위험한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널 때 강의 물이 끊어졌습니다. 17절에 보면 그들은 마른 땅으로 건너갔다고 전합니다. 물이 넘치고 홍수가 나서 거기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요단이었는데, 그것을 마른 땅처럼 건너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요단은 영적 가나안을 향해가는 신앙 여정에서 맞이하는 문제와 장애물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이 요단을 마른 땅처럼 건너게 하시는 은혜를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단을 마른 땅처럼 건널 수 있는 신앙은 어떤 신앙인지 함께 3가지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1. 빗나가지 않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전적인 믿음, 온전한 믿음입니다. 그것은 빗나가지 않는 믿음을 말합니다. 헬라어로 죄는 ‘하마르티아’인데 그 뜻은 ‘과녁을 빗나가다’, ‘목표를 벗어나다’입니다. 빗나가는 것이 죄의 본질이란 의미입니다. 이처럼 신앙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빗나가는 믿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 나올 때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충만했습니다. 열 가지 재앙을 두 눈으로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 홍해가 앞을 가로막고 뒤에서 애굽 군대가 쫓아오자 돌변했습니다. 모세를 원망하고 애굽을 그리워함으로 믿음이 빗나갔습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사건과 비슷하게 요단 강 앞에 서있습니다. 그러나 그 양상은 달랐습니다. 2절은 “사흘 후에 관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라고 전하는데, 요단 도착 3일 후 이스라엘 중간 지도자들이 백성들의 진영을 두루 돌아 다녔습니다. 이전 같으면 비방이 나올 만도 한데, 그들은 다음 절에서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라고 말했습니다. 빗나감 없이 오직 믿음으로 제사장 뒤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4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빗나가지 않는 믿음을 갖게 된 계기가 나옵니다. 언약궤를 따를 때 이천 규빗, 즉 1km의 거리를 두라는 것입니다. 거리를 두는 이유는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바라보면서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보았을 때 그들의 믿음이 빗나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함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할 때 거기에 믿음의 빗나감이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자신을 성결케 하는 신앙입니다.
5절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라고 명령합니다. 요단을 건너기 위해서 가장 먼저 성결해야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강을 건너는데 성결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믿음의 세계에서 절대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성도가 인생에서 만나는 요단을 건너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성결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회사에서 발령을 받아 시골로 내려가 살게 되었습니다.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오리를 키우기로 마음먹고 회사 창고 옆에다가 작은 수영장을 만들고, 오리농장에서 청둥오리 한 마리를 사와서 물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오리는 죽어 있었습니다. 30cm 정도밖에 안 되는 얕은 물에 빠져 죽은 것입니다. 오리 농장에 가서 주인에게 따지자, 주인은 오리 농장에서 부화하고 키운 오리는 수영할 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외모가 오리라고 모든 오리가 수영을 할 수 있는 게 아닌 것처럼 교회에 다닌다고 다 세상을 이기는 게 아닙니다. 성결해야합니다. 성결은 성도의 능력입니다. 성도의 능력은 지도력이나 언변이나 기술이나 어떤 수완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성결에서 나옵니다. 왜냐하면 성결할 때 하나님이 성도와 가장 가깝게 일하시고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반면, 성도는 성결을 잃어버릴 때 힘을 잃게 되고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5절의 후반부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성결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거하셔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결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요단을 건너가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3. 순종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신앙
성도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 합니다. 특히나 인생에서 문제의 요단, 시험의 요단을 만날 때 “하나님,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면, 제가 하나님께 순종하겠습니다.” 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기도를 들어주실 때가 있기는 합니다만 본문에 보면 그 순서가 반대입니다. 응답 후 순종이 아닌 순종 후 응답이었습니다.
6절 속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제사장들에게 그대로 행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들은 빗나간 믿음이 아닌 일사불란한 믿음으로 반응합니다. 어떤 불평도 불만도 없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6절 마지막에 보면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앞서서 나아갑니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앞으로 나간 것은 보통 행위가 아닙니다. 수위가 올라 둑을 넘쳐흐르는 요단강을 향하여 발걸음을 뗀 것입니다. 죽기를 각오하며 순종한 것입니다. 그러자 7절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도저히 건널 수 없는 때에 요단강을 건너게 하시는 이유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내가 너를 이스라엘 온 백성들 앞에서 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백성들이 여호수아를 전적으로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에는 모세가 남아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여호수아를 온 이스라엘 앞에서 세워주시기 위해서 모세가 했던 것과 같은 일을 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호수아를 크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뜻과 계획을 여호수아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바로 순종함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요단강에 발을 내딛고 나니까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깨닫기를 원하신다면,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하나님의 뜻이 밝히 알아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