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원병의 아침 묵상 159 ] 갇혀있으나 자유로운 자
얼마 전 시드니에서 아는 권사님의 따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권사님이 천국 가기 전에 목사님과 통화를 꼭 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오늘부터 상태가 많이 나빠지셔서 대신 감사전화를 드린다고... 천국 가시면서도 못난 목사를 생각해주시는 권사님 마음에 가슴이 찡 했다. 권사님 계실 때 천국설교를 자주 했었는데, 설교를 들으면서 그렇게 기뻐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여러 이야기를 하던 중, 따님과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마음이 힘들고 슬프시겠지만, 너무 슬퍼만 하지 마세요. 권사님 사시면서 고생도 많이 하셨는데, 이제 다시는 슬픔도 없고, 눈물도 없고, 애통함도 없는 천국에 가시는 겁니다. 천국은 막연한 나라가 아니라,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될 우리의 본향입니다. 지금은 잠시 해어지지만, 천국에서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다는 생각에 슬프기만 했었는데, 목사님 말씀 듣고 나니 큰 위로가 됩니다. 사실, 천국을 믿으면서도 막연하게 믿었었습니다. 현실만 보고 분주하게 살다 보니, 천국을 보지 못하며 살아왔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닥치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죽음은 더 좋은 곳으로 이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좋은 곳 정도가 아니라,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완벽한 천국으로 이주하는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애통함도 없고, 울음도 없고, 아픔도 없는 영원한 천국이 그리스도인들이 이주하게 될 최후의 정착지다(계 21:4).
우리는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지상천국이라는 뉴질랜드로 이주했다. 그러나 뉴질랜드가 한국보다 좀 더 살기 좋은 나라일지는 몰라도 천국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에서보다 더 힘들게 사는 사람도 많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천국은 없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비유컨대 독수리가 알에서 깨어나기 전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너는 이런 모습을 한 독수리란다. 네가 알에서 깨어 나가게 될 바깥세상은 이러 저러 하단다. 너는 푸른 하늘을 힘차게 날아 다니게 된다.” 아무리 말을 해주어도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이와 같다. 우리는 세상이라는 시공간의 껍질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우주가 무한하고 광대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다가 아니다. 그 너머,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다. 죽을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아직 알 속에 갇혀있는 독수리와 같다.
천국은 너무나 완벽한 영광의 나라라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차원의 세계가 아니다. 그래서 더 궁금하고, 더 바라보게 된다. 그곳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한 나의 모습은 어떤 모양일까,,, 그곳은 계시록 21장, 22장에 의하면, 온갖 보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가득하여 해가 필요 없고, 성도들은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곳에 들어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한다고 한다. 온갖 보석,,, 천국에서 보석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만큼 귀하고 아름답고 빛나는 영광의 세계라는 뜻이리라. 세세토록 왕 노릇 한다는 말은 또 무슨 뜻일까? 독수리가 알에서 깨어 바깥 세상을 날아 봐야 자신의 정체도 알고, 알 밖의 세상도 알 수가 있듯이, 우리도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가 봐야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도 알 수가 있고, 모든 것을 밝히 알게 될 것이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코 부활이라고 말하겠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일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찾아오신 일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도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다. 그러나 창조도, 성육신도, 십자가의 죽으심도 부활이 있음으로 인해서 참된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고전 15:17-20은 말한다.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라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다고 하였다. 부활이 없는 믿음, 부활의 소망이 살아있지 않은 믿음은 헛된 믿음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은 궁극적으로 부활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활 안에서만 우리의 믿음은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의 삶뿐이라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 하였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 단지 이 세상에서의 삶뿐이라면, 성도들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다. 일요일에 마음껏 쉬거나 놀지도 못하고, 어렵게 번 돈 중 일부는 헌금을 하고, 남들처럼 마음껏 세상의 즐거움을 누리면서 살지도 못한다. 더군다나 그리스도인으로 살다 보면 오른 쪽 뺨을 맞고, 왼쪽 뺨까지 내줄 때도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이 모든 것이 보상을 받는 곳이 천국이다. 단순히 보상 받는 정도가 아니다.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고,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도 이해할 수 없는 영원무궁한 영광의 나라다.
성도란 이 부활의 날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성도들 곁에 와 계신 주님은 죽음의 권세를 깨고, 무덤에서 살아나신 부활의 주님이시다. 성도들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은 죽은 자들의 세계인 무덤에서 나오라는 부활의 부르심이다.
요한복음 11장에 주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시는 이야기가 나온다.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하시자, 나사로가 무덤에서 일어나 걸어 나왔다. 무덤은 죽은 자들이 있는 곳이다.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나온 것이다. 성도들은 죽은 자들이 사는 무덤과도 같은 세계에서 부활의 세계, 생명의 세계로 불려 나온 자들이다. 부활의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무덤에서 나온 나사로는 수족이 묶여 있었고, 얼굴은 수건에 싸여 있었다(요 11:44). 무덤에서 나왔지만, 부활의 세계를 보지도 못하고, 부활의 삶을 살지도 못하는 무력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독수리가 알에서 깨어났지만, 새 세계를 보지도 못하고 날지도 못하는 모습이다. 마음의 눈이 가려져 새 세계를 보지 못하고, 마음이 아직 세상에 묶여 있어 새 부활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런 나사로를 보시고,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셨다. 성도들도 부활의 세계를 보고,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죽은 자들이 있는 무덤에 묶여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빌립보서 4장에 보면, 바울은 감옥에 갇혀있는 상태에서도 기쁨과 평안을 말하고 있다. 몸은 갇혀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부활의 세계를 보고 있었고, 부활의 삶을 살고 있었다. 이것이 성도들의 삶 가운데 임하는 부활의 능력이다. 갇혀있으나 자유로운 자가 있고, 자유로우나 묶여있는 자가 있다.
채원병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