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침 묵상 178; 세상이 주는 평안 주께서 주시는 평안,,,

기독교


 

채원병의 아침 묵상 178; 세상이 주는 평안 주께서 주시는 평안,,,

일요시사 0 1964
평안,, 잘 먹고 잘 살고, 몸 건강하고, 자식들 잘 되고, 속 썩을 일 없고, 하는 일도 잘 나가고,,, 이러면 평안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 같다. 평안한 마음으로 살고 싶지만, 평안을 누리기가 참으로 어렵다. 인생이 뭔지, 도대체 삶이 가만히 놔두질 않는다. 근심, 걱정, 삶의 무거운 짐들과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끊임없이 밀려온다.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러나,, 파도 치는 삶의 격랑 속에도 평안은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나님께서 얼마나 신실하시게 나를 사랑으로 돌보고 계신 지를 확실하게 믿을 때, 웬만한 일들은 하나님의 뜻에 맡기게 된다. 모든 근심, 걱정과 삶의 무거운 짐들을 다 하나님께 넘겨드리는 것이다. 손을 놓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최선을 다하되,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주께서는 하늘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다(마 10:29). 하물며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이야, 얼마나 더 극진하게 돌보시겠는가?

그런데 주께서는 말씀하신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하셨다. 세상이 주는 평안이란 무엇일까,,, 세상의 영광이다. 눈에 보이는 것들의 영광이다. 세상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이다. 돈과 명예와 권력, 그밖에 모든 외형적인 영광이다,, 어쩌면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영광, 세상이 주는 평안을 추구하며, 주의 이름으로 외형적인 영광을 구하면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교회조차도 그런지 모른다. 

주께서 주시는 평안은 이런 평안이 아니다. 믿는 자들에게 세상의 축복이나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축복과 함께 주시는 평안이 아니다. 주께서 주시는 평안은 오히려 이런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오직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평안이다. 돈이나 건강이나 세상의 축복과는 상관이 없는 평안인 것이다. 가진 것이 없고, 심지어는 핍박을 당하고, 가난과 고난 가운데서도 누릴 수 있는 평안이다. 그러니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신 것이다. 정말 그럴 수만 있으면 좋겠다.

성경은 말한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육체의 영광,, 세상의 영광이고, 눈에 보이는 껍데기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눈에 보이는 썩어 없어질 영광을 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껍데기를 구하지도 않고, 부러워하지도 않으며, 자랑하지도 않는다. 허망한 욕심 안에 참 평안이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는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으로 기뻐할 수 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한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십자가,,,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가 바울을 송두리째 사로잡은 것이다. 주님 달리신 십자가를 바라보니, 그 십자가에 자신도 함께 못박혀 있는 것이다. 내가 나를 못박은 것이 아니다. 못박혀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 주와 함께,,,. 

골고다 언덕 그 십자가에,,, 주와 함께,, 세상이 나에 대하여 못박혀 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못박혀 있는 것이다. 수동태다. 자기가 자신을 못박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못박으신 것이다. 그토록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못박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좀 어려운 말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면 다 된 것 아닌가? 이 사실만 믿으면 되지, 왜 나까지 못에 박혀야 한단 말인가,,, 왜 내가?

여기에는 보다 깊은 뜻이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세상이란 인간이 주인인 세상이다. 매춘과 폭력과 살인과 마약이 지배하는 세상은 물론이고, 법질서가 잘 지켜지고, 범죄가 없고, 복지가 잘 이루어진 세상도 여기에 해당이 된다.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고 인간이 주인이라면, 지상천국도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할 세상인 것이다. 

그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 세상에 대하여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다. 단지 세상욕심뿐만이 아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 사는 모든 것에 대하여, 나는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것이다. 세상이 자녀들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내가 나의 주인이 되지 못하도록,,,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 되시고, 주님이 되시도록,,, 하나님께서 사랑의 대못을 박으신 것이다. 그토록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히브리서 12장 11절은 말한다. “무릇 무슨 견책이든지 그 당장에는 즐겁기보다는 오히려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책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은 마침내 평화의 열매를 맺어 올바르게 살아 가게 됩니다.”(공동번역성경)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못을 박으시면서 주고 싶어하시는 것은 결국 평화의 열매, 평안의 열매다. 진정한 평안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오직 예수님께서 나의 주님이 되실 때만 누릴 수 있는 평안이기 때문이다. 그 평안은 나의 평안, 내가 얻어낸 평안이 아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나 외형적인 영광이 줄 수 있는 평안이 아니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평안이고,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주님의 평안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자기가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고는, 결단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주님을 주님으로 모실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께서 주시는 평안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리에 계시고, 주님께서 주님의 자리에 계실 때만 누릴 수 있는 평안이다. 자기가 부인되지 않고는 누릴 수 없는 평안이다.

자기부인,,, 자기 비움? 내려놓음? 아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를 비우는 것이나, 자기를 내려놓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내려놓음’이라는 책도 있지만, 내가 무엇을 내려놓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내려놓긴 뭘 내려놓는단 말인가? 이런 말이 그럴 듯하고, 멋있어 보이지만, 매우 위험스러운 표현이다. 자기부인은 자기를 내려놓는 것도 아니고, 자기를 비우는 것도 아니다. 바위 같이 굳센 의지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깨지고 부서져서,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하나님 앞에 엎어지는 것이다. 철부지 같이 자기가 자신의 주인인 것처럼 살다가, 하나님께서 내리치셔서, 깨지고 부서져 못 박히는 것이다,,, 때로는 말씀의 몽둥이로, 때로는 삶이라는 몽둥이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못 박으시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 자가 되어,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되는 것이 자기부인이다. 하나님만이 저의 모든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의 영광도, 육신의 영광도, 눈에 보이는 어떤 영광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제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필요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만 계시면, 저는 행복합니다. 오늘 하루도 이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리에 계시고, 주님이 주님의 자리에 계실 때만 찾아오는 하나님의 평안이다. 인간의 영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도 없고, 하나님의 평안도 있을 자리는 없다.

채원병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0 Comments
제목
광고 Space available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KakaoTalk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