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영광이 임하는 교회와 신앙(겔43:1-10)
때로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영광이 찬란하고 멋져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세상의 영광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영광에 비할 바는 못 됩니다. 그것은 마치 강렬한 태양 빛에 별빛들이 가려지듯, 세상의 영광은 아무리 찬란하다 해도 하나님의 영광에 가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영광은 언제 경험되는가? 하나님께 찬송을 올려드릴 때 경험됩니다. 시 22:3에 보면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찬송하는 자리에 임재하시는 분이십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에스겔 선지자가 본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환상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의 ‘그발’이라는 강가에서 하나님의 환상과 계시를 받은 사람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신 환상 중 가장 감격적인 환상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범죄로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영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더라(겔43:4-5)” 이 에스겔서의 말씀처럼 어떻게 하면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는 교회가 될 수 있는지 네 가지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1.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일하시는 교회입니다.
“이는 내 보좌의 처소, 내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에 영원히 있을 곳(겔43:7)” 여기서 “이는” 하나님의 성전, 즉 교회를 말합니다. 그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께서는 “내 보좌의 처소”라는 말씀하십니다. 보좌는 왕이 앉는 자리입니다. 왕은 보좌에 앉아서 나라를 통치합니다. 그러므로 “왕이 보좌에 앉는다”는 말은 왕이 그 나라를 통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교회가 하나님의 보좌의 처소라는 것은 왕 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교회를 통해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예배드리는 자리는 아무렇게나 여길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와 예배하고 있음을 기억해야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내 발을 두는 처소”라고 하십니다. “내 발을 두는 처소”는 어려운 말로 발등상입니다. 즉, 왕이 발을 올려놓는 받침대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 하나님의 발등상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발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행동을 의미하는데, 교회가 하나님의 발등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일하시고 행하시는 사역의 근거지가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서 일하시고 역사하기를 원하십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행하기를 원하시는 그 일을 이루어드리는 것입니다. 교회 일에 있어 다른 문제들로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원하시는 일에 집중하여 그 일을 이루어드리기를 바랍니다.
2. 진리의 말씀이 폭포수와 같이 선포되는 곳입니다.
지난 10월 남태평양 지방의 감리교회들이 우리 광림교회에 모여서 사경회를 가졌습니다. 사경회를 진행하니 모든 예배실에서 하나님의 말씀들이 가르쳐졌습니다. 강의가 끝날 때는 모든 반들에서 찬양소리가 가득했습니다. 마치 에스겔서의 한 장면과도 같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많은 물소리와 같이 쏟아지는 교회입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겔43:2)” 하나님의 영광은 사람의 소리가 나는 곳에 임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소리가 그치고 하나님의 소리가 나올 때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십니다. 하나님의 소리만이 들려와 성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참된 예배가 있는 교회입니다.
참된 예배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앞에 합당한 예배를 뜻합니다. “그 모양이 내가 본 이상 곧 전에 성읍을 멸하러 올 때에 보던 이상 같고 그발 하숫가에서 보던 이상과도 같기로 내가 곧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더니(겔43:3)” 에스겔은 하나님 앞에 참 예배자의 모습으로 나아갔습니다. 그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자 여호와의 영광이 임했습니다. 이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께 나와서 고개를 뻣뻣이 하고 나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께 나와 엎드리는 예배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의 비유가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나와 기도할 때 “하나님, 나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했고, 이만큼 헌금했고, 저 세리와 같지 않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열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반면에 세리는 하나님께 나와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세요.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엎드리는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 세리의 엎드려 예배함을 받으셨습니다. 세리의 기도처럼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마26:39). 이처럼 하나님께 엎드리면 하나님의 긍휼을 얻습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참된 예배가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우상이 제거되는 곳입니다.
에스겔은 환상을 통해 여호와의 영광이 다시 성전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말은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을 떠났던 이유는 우상숭배 때문이었습니다. 유다의 므낫세 왕은 성전 마당에 우상 제단을 쌓고 자기가 만든 아세라 목상을 세웠습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는 내 보좌의 처소, 내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에 영원히 있을 곳이라 이스라엘 족속 곧 그들과 그들의 왕들이 음행하며 그 죽은 왕들의 시체로 다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겔43:7)” 므낫세 왕처럼 왕들은 음행, 즉 영적인 음행인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 왕들이 섬겼던 우상들을 에스겔은 ‘죽은 왕들의 시체’란 말로 표현합니다. 왕이란 것은 세상에서 가장 힘 있고 흠모하는 존재입니다. 반면에 시체는 가장 힘없고 추한 것입니다. 두 말을 동시에 쓰는 것은 우상 숭배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상숭배는 솔로몬 성전 마당에만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도, 교회 안에도 우상은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3:5)” 우상은 신상이나 조각만이 우상이 아닙니다. 보이는 우상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를 넘어뜨리는 우상은 내 안에 있는 탐심입니다. 탐심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우상숭배입니다.
구약의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견고하기로 유명한 여리고를 무너뜨린 후에 어이없이 아이성에서 패배를 당했습니다. 그 이유는 탐심 때문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가진 탐심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패배를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탐심을 제거하자 그들은 다시 승리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탐심, 신앙의 우상을 제거해버린 다면 하나님의 영광은 다시 돌아오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