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8) 주의 손으로 만져주소서

기독교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8) 주의 손으로 만져주소서

일요시사 0 1012

막 10:13-16

13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오늘 이 어린이주일에 준비한 말씀의 제목은 “주의 손으로 만져 주소서.”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의한 Touch! 만지심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중심에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나아오는 부모님과 자녀들의 모습이 그려지죠. 볼까요? 13절에 이야기의 출발입니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예수님께서 자신의 아이를 한 번 쓰다듬어 주신다면 얼마나 큰 축복이겠습니까? 그렇기에 사람들이 저 기적인 베푸시는 예수님의 손길로 우리 안에 머리 한 번 쓰다듬어 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그런데 보니까, 제자들이 꾸짖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시고 노하셨다고 말씀합니다. 화를 내셨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그리고 오늘 본문 16절로 이어집니다.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오늘 전체적인 내용이 그림 그려지시나요?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데리고 예수님의 만지심을 바라면서 예수님 앞에 나옵니다. 제자들이 중간에서 막아섰지만, 결국에는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을 안아 주시고, 안수하시고, 즉 예수님의 touch! 만지심을 경험하는 것으로 말씀이 마무리됩니다. 

 

우리 자녀들을 우리 주님께서 만져주시길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똑똑한 부모도, 아무리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도, 아무리 자녀를 잘 양육하는 부모도, 아이의 손을 일평생 잡아주지 못합니다. 지금은 내가 아이를 안아주고, 뽀뽀도 하고, 손잡아 주시고, 쓰다듬어 주고, 그렇게 친밀하게 가까이 있는 것 같아도, 아이에게 사랑의 접촉을 통해서 저들의 인성을 잘 개발시켜 주는 것 같아도, 그게 언제까지고 영원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결국 필요한 게 무엇인가? 오늘 제목입니다. “주의 손으로 만져주소서.” 하나의 기도문 형식의 제목입니다. / 왜 이런 제목을 정했을까요? 어린이 주일을 맞이해서 “자녀를 믿음으로 양육하는 방법” 이런 제목 정할 수 있겠죠. “우리 자녀! 이렇게 키워야 합니다.” 이런 제목도 괜찮겠죠. 그런데 그건 아이를 안 키워 본 사람 이야기입니다. / 내 아이 내 마음대로 되던가요? 수많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 선생님도 내 아이는 안 된다고 합니다. 자녀 교육방법론의 대가도 내 자녀는 감당 못하더라구요.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몰라서 못 키우는 건가요? 다 알죠. 그런데 안 되니까 문제죠. 그래서 오늘 예수님 앞에 선 어린 아이들을 데려온 부모님들의 모습이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이 모습을 보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오늘 제목을 정한 겁니다. “주여! 주의 손으로 우리 자녀를 만져주옵소서.” “내 자녀의 손을 붙잡아 주옵소서.” 그 사모하는 모습에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을 안으시고, 안수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이러한 축복이 여러분들의 자녀와 손주들에게 있어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은 주의 손에 붙잡힌바 된 성경의 인물들, 특별히 어린 시절부터 주의 만지심 안에 거한 세 명의 모습을 조명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함께 말씀을 듣는 중에, 우리 자녀가, 내 손손주들이 이러한 믿음의 인물 되길 원합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내 자녀손의 이름을 떠올리며 축복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받을 때에, 동일한 축복의 역사가 우리 자녀손들에게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첫 번째 인물은,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 구하여 얻다.”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어머니 한나가 열심히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이기에,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지었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사사시대와 왕정시대 중도기에 활동한 인물입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이기도 하고, 선지자와 제사장의 역할을 동시에 감당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웠고, 후에는 다윗에게 다시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웁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대단한 공헌을 한 인물입니다. 그의 선지자로서의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말씀이 사무엘상 3장 19절과 20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이를 모든 백성들에게 인정받기까지 한 그야말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사무엘이 이런 인물이 될 수 있었는가? 사무엘은 어린 시절부터 늘 하나님과 가까이 있기를 원했습니다. 사무엘상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를 때에, 사무엘이 잠을 자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당시 제사장인 엘리는 눈이 어두웠고, 그 시대는 말씀이 희귀하고 하나님의 이상이 잘 보이지 않던 때였습니다. 이게 당시 이스라엘의 현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영적인 암흑기였다는 거죠. 여기까지는 절망입니다. 하지만 3장 3절에 보니까, 성막에 있는 하나님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고, 그 성전 안에서 사무엘이 잠을 자고 있었으며, 그 때 하나님의 부르심이 사무엘에게 들려집니다. 영적 암흑기에 새로운 광명이 비추어지는 장면입니다. 이 모든 것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사무엘이 성전 안에서 잠을 자고 있는 그 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보십시오. 성전 안에 잘 때가 거기밖에 없었겠습니까? 엘리에게 처소가 있는데, 사무엘은 없었을까요? 하지만 사무엘은 하나님과 가까이 있기를 원했습니다. /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밤새도록 켜 있어야 하는 성전의 등불이 꺼지지 않게 지켜가면서, 성전 안에, 하나님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서 쪽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의 출발은 하나님의 전에서 누워 자던 그 때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부르심을 사모하던 사무엘을 하나님의 손으로 만져주신 것입니다. 우리 자녀손들이 사무엘과 같은 믿음의 인물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전을 가까이 하는 자에게 임하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에게 임하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만지심을 통해 새로운 영적 각성을 이루고, 승리의 역사를 이루고, 새 시대 귀한 지도자로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과 같은 축복이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자녀손들에게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 인물은, 기도의 사람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은 심판자이시다.”라는 뜻을 지닌 이름입니다. 다니엘은 바베론의 예루살렘 침공 때에 포로로 잡혀간 인물이죠. 당시 바벨론의 왕인 느부갓네살의 인재 등용 정책은 능력 중심이었습니다. 자기 민족만이 아니라, 비록 포로의 신분이라고 할지라도 능력이 있는 인재를 등용해서 국가의 대소사를 맡겼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탁월한 인물이 바로 다니엘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다른 어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지혜와 총명과 명철이 뛰어났다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 자리에 함께 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자녀손들에게 이러한 지혜와 총명과 명철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럼 다니엘의 이러한 지혜가 어디서 생겨났는가? 다니엘 1장 17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다니엘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신 것이 누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다니엘을 만져 주신 것입니다. 이후에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해냅니다. 꿈을 해석할 때도 보면, 그냥 자신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세친구들과 함께 모여서 열심히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알려주십니다. 이 일로 다니엘은 왕궁에서 거주하면서 나라의 대소사를 처리해나갑니다.

  

다니엘이 가진 이 모든 지혜와 총명이 어디서부터 주어졌습니까? 다니엘의 변함없는 형통의 삶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다니엘 1장 8절입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이어서 다니엘 6장 10절입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하루 세 번 씩 무릎을 꿇고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만을 행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쉬지 않겠다고 마음을 정하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만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서 전체를 보면 계속 반복되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다니엘이 어떤 자리에서 무엇을 해도 늘 하나님께서 붙잡아주시고, 그 삶을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 다니엘... 우리 자녀손들도 다니엘과 같이 변함없이 기도함으로 변함없는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를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인물은, 비전의 사람 요셉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더하시길 원한다.”라는 이름 뜻을 지닌 인물입니다. 아버지의 편애로 인해 철없이 자라나던 어린 시절, 그로 인해 형제들에게 노예로 팔려지는 답답한 현실, 그러다가 노예 중에서도 꽤나 유력한 인물이 되었지만, 억울하게 다시 감옥에 갇히는 죄수 신세.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서도 결국에는 자신이 어린 시절 꾸었던 그 꿈대로 이루어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인물로 세움 받게 되죠. 아브라함이 약속의 말씀을 받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면, / 이삭은 축복의 계승자이고, / 야곱은 축복을 꽃 피운 인물이며, / 요셉은 그 축복의 열매를 거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역사가 어디서부터 일어났는가? 앞서 본 사무엘이나 다니엘과는 조금 다른 모습입니다. 사무엘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사모함이 있었죠. 다니엘에게는 뜻을 정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에게는 그냥 하나님 주신 꿈만 있었습니다. 그 꿈을 어떻게 이루어가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철부지 어린아이의 모습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께서 요셉을 야곱의 손에서 빼앗아서 담금질하십니다. 훈련시키십니다. 그리고 큰 역사를 맡기시고 이루게 하십니다.

 

사무엘과 다니엘에게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요셉에게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요셉의 삶에 개입하셔서 친히 그의 손으로 붙잡아 주십니다. 야곱의 손에 있던 요셉을 하나님의 손으로 이끌어내십니다. 하나님의 만지심이죠. 이를 통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약속하신 축복의 성취를 이루게 하십니다. 우리 자녀손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만지심의 손길이 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꿈을 꾸게 하시고, 비전을 품게 하시고, 그 꿈을 성취케 하시는, 비전의 사람... 요셉과 같이 나라와 민족과 세계 열방을 위해 쓰임 받게 하시는 위대한 축복의 역사가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주의 만지심이 있을 때에 우리 자녀손들이 사무엘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 다니엘과 같은 기도의 사람으로, / 요셉과 같은 비전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될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우리 자녀손들을 사랑하고, 축복하고, 위해서 기도할 때에, 주의 만지심의 손길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모든 자녀손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 게시물은 일요시사님에 의해 2019-11-06 14:37:16 교민뉴스에서 이동 됨]
[이 게시물은 일요시사님에 의해 2019-11-06 14:51:56 기독교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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