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9) 감당 못 할 산 앞에 서서

기독교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9) 감당 못 할 산 앞에 서서 <역대하 20:12~19>

일요시사 0 1157

 “당신은 왜 그토록 위험한 산에 오릅니까?”라는 물음에 영국 등반가 조지 말로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산이 거기에 있기에 오른다.” 1924년에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초등등반을 시도하다가 실종된 조지 말로리의 이 말은 산악인들에게는 좌우명과도 같이 여겨지는 말입니다. 사실 일반 사람들은 생명을 걸고 그 위험한 산에 오르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산악인들의 조난 사고와 관련된 뉴스를 접할 때마다 그렇게 말하죠. “도대체 왜 그렇게 위험한 산에 오를까?” 사실 이런 산은 안 오르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의 삶 가운데도 산과 같은 일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오를 수밖에 없는 산과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 저기를 둘러봐도 다 산입니다. 그것도 만만한 동산이 아니라,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정말 감당 못할 산 앞에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지금 산 앞에 서 있습니다. 힘겹게 그 산을 오르는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정상에 오르는 것이 쉽습니까? 힘듭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동일한 상황 가운데 놓여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여호사밧 왕은 남유다의 네 번째 왕으로, 그는 하나님을 잘 따르는 왕이었습니다. 입법, 사법, 행정 모든 부분에 있어서 절대 권력을 가지고 평안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평화로운 남유다에 위기가 찾아옵니다.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 마온 사람들이 연합군을 조성해서 남유다를 쳐들어 온 것입니다. 이러한 위기 앞에 선 남유다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남유다는 저들을 대적할 능력이 없습니다. 도저히 감당 못할 산 앞에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우리 성도님들 중에는 종류만 다를 뿐, 이러한 감당 못할 산과 같은 위기를 이미 여러 차례 경험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앞에 놓여진 감당 못 할 산 앞에 서서, 어떠한 모습으로 그 산을 오를 것인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 새로운 힘과 능력을 얻는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 맡겨 드려야 합니다. 

 

내가 감당 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오늘 여호사밧을 보십시오. 세 나라의 연합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한 것이 무엇입니까? 3절과 4절입니다.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매 유다 사람이 여호와께 도우심을 구하려 하여 유다 모든 성읍에서 모여와서 여호와께 간구하더라.” 하나님께 맡겨드립니다. 그러면서 5절부터 12절까지 보면 전체가 다 하나님을 향한 도우심을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보십시오. 기도의 내용은 여덟 절에 걸쳐서 나오는데, 나중에 전쟁에서 승리한 내용은 20절부터 23절까지 단 네 절입니다. 싸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맡기는 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싸우는 것은 내가 하겠다는 의지입니다. 하지만 맡기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13절도 보십시오. “유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아내와 자녀와 어린이와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더라.” 모든 백성들이 다 모여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맡김입니다. 

  

여러분! 기도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책임전가입니다.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그 책임은 내가 아니라, 이제 하나님이 지시는 겁니다. 그 때부터는 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문제입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그 순간,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감당 못 할 산 앞에 서서. 그것이 경제적인 산이든, 건강의 산이든, 자녀에게 주어진 산이든, 내 자신 앞에 선 산이든, 또한 그것이 영적인 산이든, 마음의 산이든, 육적인 산이든... 감당 못 할 산 앞에 서서.. 내가 감당 못 할 것인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께 맡기시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맡기며 기도할 때 우리는 무엇을 기대합니까? 기도응답의 역사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한 편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서 내가 무엇을 기도했는지조차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게 기도응답이었는데도, 응답 받았다는 사실초자 잊어버립니다. 내가 뭘 기도했는지도 모르고, 내가 뭘 응답받았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문에도 여호사밧과 온 유다백성들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 맡겨드렸습니다. 그러자 선지자 야하시엘을 통해 하나님의 응답이 옵니다. 17절입니다.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 맡겨드리니까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15절 후반부에도 보십시오.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첫 번째에서 기도는 책임전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맡겨드렸기에 내가 할 것이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몫입니다. 하나님의 책임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오늘 전쟁의 모습도 보십시오. 22절과 23절입니다.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주민들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죽였더라.” 남유다 백성들이 한 게 무엇입니까? 그냥 구경만 한 것입니다. 싸움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감당 할 수 없다고 고백한 것 뿐입니다. 그러자 그 감당 못 할 싸움을 하나님이 대신 하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역사들, 출애굽 홍해 사건, 늘상 이야기하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또한 오늘 여호사밧의 전쟁 이야기. 그에 따른 결과는 모두 은혜입니다. 내가 감당해 할 부분을 하나님께서 감당하셨기에 은혜인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기에 은혜입니다. 은혜라는 말을 보십시오. “은혜는 ‘은’자에 은혜 ‘혜’자”입니다. 은혜와 은혜가 더해져서 은혜가 됩니다. 따로 떨어뜨려도 은혜고, 함께 모아 놓아도 은혜입니다. 그렇기에 은혜는 전적인 것입니다. 다른 어떤 의미가 담긴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도우심, 사랑, 기도응답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김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이 찬양 안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맡겨드릴 때에 응답의 은혜를 경험할 것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결과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지라도 믿음으로 먼저 감사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후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지만, 동일한 것은 찬양 안에 감사가 녹아져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호사밧의 모습을 보십시오. 선지자를 통해 응답 받은 후에 18절에 하나님을 향해 경배합니다. 그리고 19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 보시면 아시겠지만, 아직 전쟁 전입니다. 여전히 모압과 암몬과 마온 연합군은 도저히 감당 못 할 산으로 남유다 앞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 때 여호사밧은 레위 사람들을 찬양대로 세워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지금이라도 빨리 군사를 모아야 할 터인데, 여호사밧은 지금 찬양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그 믿음의 표현이 20절 중반부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지만, 믿음으로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21절에서 전쟁에 임할 때에도 백성들과 의논해서 내린 결정이 노래하는 자들을 군대 앞에 세우고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22절입니다.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찬양이 시작될 때에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찬송이 시작될 때에 하나님이 대신 싸우십니다. 이어서 23절에 보니까 서로 싸우다가 다 자멸하게 됩니다. 연합하여 남유다를 쳐들어왔는데,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다 망하고 맙니다. 누가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실 줄 믿고, 주님만을 높여 찬양했더니, 그 믿음의 고백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셨습니다.

  

도저히 찬양 할 수 없는 전쟁의 위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 절망적인 현실 가운데도 하나님께 찬양할 때에, 감사함으로 주님을 찬양 할때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고, 감사로 마무리 할 때에 더 큰 감사의 조건들이 펼쳐진 것처럼, 우리에게도 동일한 감사와 축복이 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 게시물은 일요시사님에 의해 2019-11-06 14:36:49 교민뉴스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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