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00); 천지무용 (天地無用) <마태복음 7:15~27>
“천지무용” 오늘 말씀의 제목입니다. 이 말은 일본식 한문입니다. 공사 현장이나 택배박스 같은데 쓰는 말인데, “위 아래를 뒤집지 말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은 산상수훈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팔복의 말씀으로 시작해서, 오늘 본문까지 전하신 예수님의 메시지는 하나로 이어집니다. “천국 백성의 삶의 모습”. 산상수훈의 주제는 이거 하나입니다. 천국백성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러면서 오늘 마지막에 말씀하시죠. 24절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이어서 26절입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한 마디로, 지금까지 전한 모든 예수님의 가르침의 말씀을 그대로 잘 행하라. 그래서 천국 백성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믿음의 기반을 든든히 다지는 것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중요한 것은 기초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의 신앙의 고백”을 반석 삼아서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이 모든 것을 뒤집어 버리려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뿌리가 중요한데, 잎사귀만 무성하게 하려고 합니다. “천/지/무/용” 위아래를 뒤집으면 안 됩니다. 위에 있어야 할 것은 위에 있어야 하고, 아래에 있어야 할 것은 아래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삶도 마찬가지로 기초가 중요합니다. 그럼 이러한 든든한 신앙의 영적 터전을 구축하기 위해서 필요한 믿음의 자세가 무엇인가? 예수님 주신 말씀을 통해 믿음의 기초를 든든히 다지는 은혜의 시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번째로, 좋은 열매를 맺는 믿음입니다.
“목지필화 화지필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무는 반드시 꽃을 피우게 되고, 꽃은 반드시 열매로 이어진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 믿는 자의 삶에도 열매가 있어야 함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열매로서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믿는 자를 향해서도 이 땅 가운데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야 함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본문 16절에 말씀하죠.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어서 17절과 18절에 보면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자들은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할까요? 당연히 좋은 나무가 되어서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시기가 가득하고,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분냄이 가득하고,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교만이 가득하다면,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못된 열매를 맺어가고 있다면, 그건 둘 중에 하나인 겁니다.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있지 않거나, 예수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지 않거나.
여러분! 기독교는 다분히 이분법적입니다. 천국 아니면 지옥이고, 지옥 아니면 천국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보면 좋은 열매 아니면 나쁜 열매고, 좋은 나무 아니면 못된 나무입니다. 어떤 나무가 되길 원하십니까? 어떤 열매를 맺어가길 원하십니까? 주의 말씀을 매 주마다 듣는 자로서, 주의 말씀을 매일 묵상하는 자로서, 항상 주님께 우리의 삶을 맡겨드리며 기도하는 자로서 합당한 열매를 맺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삶 속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가고, 그 열매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일이 아닌 사명감당하는 믿음입니다.
오늘 21절에 보면 예수님의 충격적인 선언이 나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우리가 믿는 자로서 “주여”는 잘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22절과 23절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 말씀을 받는 입장에서는 참으로 난감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리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도대체 예수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게 무슨 의미인가요?
이어서 24절에 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모든 것의 답은 말씀에 있습니다. 말씀대로 행함에 있습니다. 내 힘으로 하지 말고, 내 열심 가지고 하지 말고, 말씀에 의지해서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주의 일을 할 때에, 일이 아니라 사명 감당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고, 교회생활하다 보면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단순히 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교회에 왔는데, 일할 게 자꾸 보이면 안 됩니다.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할 만한 것이 보이면 안 됩니다. 하나님 내게 주신 사명이 눈에 띠어야 하는 거죠.
중요한 것은 내게 주어진 모든 일들을 단순히 일로 여기지 않고, 사명 감당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거기에 은혜가 있고, 거기에 만족이 있고, 거기에 새로운 힘주심과 능력 주심이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신 사명 힘써 감당하여 천국 백성으로 합당한 삶을 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말씀과 기도의 반석 위에 서는 믿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죠. 지혜로운 사람이 있고,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 그런데 지혜와 어리석음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가? 내가 말씀 위에 서 있는가? 내 생각 위에 서 있는가? 이 차이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의지함으로 신앙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예수 믿는 자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말씀을 떠나면 아무 것도 못하는 겁니다. 기도를 게을리 하면 살아갈 힘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때로 신앙생활 하면서 시험에 들었다고 합니다. 상처 받았다고도 합니다. 그 모든 것이 어디서부터 옵니까? 사람의 말을 의지하면 상처 받는 겁니다. 내 생각을 주장하다보면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단으로부터 시험 받으실 때도 보면, 예수님조차도 예수님의 생각대로 시험에 대응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시험을 말씀으로 이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지막 십자가의 죽으심 앞에서도 인간적인 고뇌가 있었지만, “주여!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그 모든 것을 이겨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말씀과 기도의 반석 위에 서시기 바랍니다. 말씀과 기도의 반석 위에 서야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에, 합당한 삶의 전환이 있어집니다. 그럴 때에 흔들림 없는 신앙의 삶을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의 반석 위에서 서서 흔들림 없는 신앙의 길을 걷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