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불쌍히 여기면 행복해집니다. (마 5:7, 엡 4:32)

기독교


 

서로 불쌍히 여기면 행복해집니다. (마 5:7, 엡 4:32)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긍휼의 부재입니다. 시대가 점점 각박하고 잔인해져갑니다. 이러한 긍휼의 부재는 지금뿐만이 아닌 예수님 당시에도 비슷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택하셨다는 자부심과 율법에 대한 열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잃었습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 날이면 어떤 사람이 고통으로 죽어간다 해도 안식일 규정을 내세워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5:7)” 이 말씀을 풀어서 말하면 너희들은 서로 긍휼히 여기고 서로 불쌍히 여겨라. 그리하면 행복한 자가 되리라 왜냐하면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너희를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라는 뜻입니다. 긍휼의 부재 가운데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불쌍히 여길 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함께 세 가지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긍휼은 기적의 씨앗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많은 기적과 이사를 행했습니다. 이것들을 행하게 된 동기는 긍휼하심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는 한 나병환자가 겁도 없이 예수님 앞에 와서 엎드려 낫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원래 나병환자는 사람들과 격리되어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옆에 있을 때는 부정하다, 부정하다외쳐서 그들이 알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나병환자는 그런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예수님 앞에 와서 엎드린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부정한 자였기에 율법대로라면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물리쳐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습니다(8:3). 그를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8:3)” 이 말씀에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긍휼이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나병환자에게 기적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유다의 왕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잘 믿는 왕이었습니다. 그가 중병으로 죽게 되자 그는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기도했습니다. “주여 제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한 것들과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38:3)” 주님 앞에 엎드려 통곡으로 기도하자 하나님의 마음이 감동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히스기야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은 것입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을 십오 년을 더하리라(38:5)” 하나님께서 긍휼이 여기심으로 히스기야는 생명이 연장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마음에 불쌍한 마음이 들면 어떤 문제도 그 긍휼하심 앞에서 무너지게 됩니다. 그렇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때 가장 먼저 구할 것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이라고 말합니다(4:16). 하나님의 긍휼은 기적의 씨앗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풍성히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긍휼’, ‘긍휼한 마음하면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고 불쌍한 마음을 갖는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긍휼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긍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헤세드인데, 이 말은 그 사람의 눈으로 그의 상황을 볼 수 있기까지, 그 사람의 마음으로 그의 상황을 생각할 수 있기까지, 그 사람의 감정으로 그의 상황을 느낄 수 있기까지, 그 사람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 긍휼의 시작은 내가 그 사람이 되어보는 것입니다.

   정태기 박사라는 신학교 상담학 교수가 있습니다. 그는 35세 때 미국에 건너가서 상담학을 공부했습니다. 상담학을 공부했음에도 수십 년 동안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괴로워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한 번도 자식에게 애정 표현을 해준 적이 없는 아버지였습니다. 한번은 정태기 박사의 가족이 겨울날 다같이 모여 밥을 먹었습니다. 그 날 귀한 생선 반찬이 올라왔는데, 어린 정태기 박사는 그것이 너무 먹고 싶었습니다. 계속 아버지 눈치를 봤는데 아버지는 생선 쪽으로는 눈도 안 돌렸습니다. 아버지가 안드시는거 같아 자기도 모르게 젓가락이 생선에게 갔습니다. 그때, 숟가락이 날아오면서 밥상이 엎어졌습니다. 아버지는 욕을 하면서 소년 정태기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정태기 박사는 무서워 그 추운 겨울날 갯바위까지 도망가 울었습니다. 이런 깊은 상처가 있는 그였습니다. 박사 논문을 마무리했는데 하루는 지도교수가 전공을 바꾸라고 권면했습니다. 그 이유는 한 번도 속내를 드러낸 적이 없는 그가 상담을 하기에는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제서야 정태기 박사는 자기 어린 시절의 상처를 내놓았고 지도교수는 그 이야기를 다 들어주었습니다. 겨울 갯바위에서 추운 칼바람에 떨면서 울고 있는 소년 정태기에게 태기야 얼마나 추웠니? 얼마나 아팠니? 얼마나 배고팠니?”라고 지도교수는 말을 건넸습니다. 이 말에 어린 시절 정태기 박사의 응어리진 상처가 눈물과 함께 씻겨 내려갔습니다. 그날 그는 교수의 모습으로 찾아오는 아버지를 만났고, 나아가 그를 넓은 품에 받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을 경험하였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풍성히 경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3. 긍휼히 여기는 자가 행복한 자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5:7)” 우리는 누군가를 긍휼히 여길 때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조건 없는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이후 하나님의 긍휼을 입으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이 없는 심판이 있으니라(2:13)” 하나님 앞에 긍휼을 받은 자는 남을 긍휼히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어린 딸과 함께 산지에 살면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잃은 양을 찾다가 가시나무에 걸려 버둥거리는 양을 발견했습니다. 조심스럽게 양을 가시덤불에서 떼어내었는데 이미 여러 곳에 긁히고 상처가 나있었습니다. 소녀는 양이 너무 불쌍해서 "아빠, 저 나무가 미워요. 저 나무를 잘라버려요."라고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다음 날 아버지와 딸은 도끼를 가지고 가시나무를 잘라 버리려고 그곳을 찾아갔습니다. 나무 가까이 갔을 때 소녀는 작은 새 한 마리가 그 가시나무 위에 앉아 양이 가시에 긁히면서 남겨놓은 털들을 쪼아 모으는 것을 보았습니다. 작은 새는 부리 가득히 털을 물고는 날아갔습니다. 이것을 자세히 살피던 어린 딸은 "아빠, 하나님께서 왜 이곳에 가시나무를 자라게 하시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아요. 나무의 가시들은 작은 새가 집을 지을 수 있는 부드러운 털을 모으는 일을 하는가 봐요."라고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에베소서 432절은 말합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긍휼이 여길 줄 아는 자가 행복한 자입니다. 긍휼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우리도 긍휼히 여기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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