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론의 수선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2장 1절)

기독교


 

<채원병의 아가서 묵상> 샤론의 수선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2장 1절)

일요시사 0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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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람미 여인은 “나는 샤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라고 노래한다. 샤론의 수선화,, 골짜기의 백합화,, 무언가 가냘퍼 보이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이 연상이 된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노래한 것일까? 

 

수선화,,, 어떤 꽃인가?

 

수선화는 그리스신화에서 나오는 나르시스라는 목동에서 유래된 꽃이다. 나르시스는 아주 잘 생긴 소년이었다. 요정들이 나르시스에게 반해서 구애를 하지만 나르시스는 쳐다 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한 요정이 복수의 여신을 찾아가서 이렇게 부탁을 했다. “나르시스가 처음 보는 이와 사랑에 빠지게 하고, 그 사랑이 깨지게 해달라”고,,, 복수의 여신은 그 요정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하루는 나르시스가 양떼를 몰고 가다가 목이 말라 연못으로 갔는데, 물을 마시려던 나르시스는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반하게 된다. 연못에 비친 아름다운 모습이 자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요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르시스는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 자리를 떠날 줄을 몰랐다. 그러다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따라 들어가 연못에 빠져 죽게 된다. 나르시스가 죽은 자리에 청초하면서도 가련해 보이는 꽃이 피어났는데, 그 꽃 이름이 수선화다. 그래서 수선화를 ‘나르시수스 라고 하고, 자기도취에 빠지거나,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났다고 여기는 경우를 나르시즘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왕자병이나 공주병에 걸린 사람을 나르시스트라고 한다.

 

술람미 여인은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뜻인가? 그러나 술람미 여인은 앞에서 자신을 게달의 장막과 같다고 하였으니, 최소한 공주병 환자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샤론'은 팔레스틴 지역의 서부, 즉 지중해 동부 연안 지역의 넓은 평야를 말한다. 욥바에서 북쪽 갈멜산 지역에 이르는 샤론 평야는 남북이 약 80여km, 동서가 10-19km에 달하는 넓은 평야로서, 이곳에는 많은 들꽃들이 자라고 있다. '샤론의 수선화'란 샤론 평야에서 자라고 있는 수많은 들꽃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술람미 여인은 예루살렘 왕궁의 궁녀들과는 달리, 자신을 들판에 피는 들꽃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별로 매력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수선화라는 꽃이 갖는 꽃말이 ‘자기도취’ ‘자기애’인데, 이와는 정반대의 의미로 술람미 여인은 자신을 들꽃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술람미 여인은 또한 자신을 골짜기의 백합화라고 하였다. 이 또한 자신이 골짜기에 피어난 백합화처럼 아름다운 여자라는 뜻이 아니다. 골짜기는 움푹 파여서 눈에 띄지 않는 곳이다. 술람미 여인이 자신을 골짜기의 백합화에 비유한 것도 자기가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평범한 꽃이라는 고백이다. 

 

양을 치고, 포도원에서 일하는 자신은 들에 피는 꽃처럼 특별히 자랑할 만한 아름다움도 없고, 골짜기에서 피어난 꽃처럼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여자에 불과하다는 고백인 것이다. 

 

주님 앞에 선 우리의 모습이 그렇다. 우리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시하며 피어있는 화려한 꽃이 아니다. (화 있을진저,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바리새인들이여!) 자신의 아름다움에 도취해 사는 수선화도 아니다. (화 있을진저,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이여!) 

 

주님의 성도들은 들에 피는 들꽃이다. 그들은 눈에 띄지 않게 골짜기에 피어나는 백합화다. 이 세상에서는 크게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이다. 더욱이,, 주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전혀 없는 보잘것없는 들풀과도 같은 존재다. 

 

땅의 영광, 세상의 영광, 육신의 영광을 바라며 피는 꽃들,,, 화려하게 피어나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예루살렘의 여인들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다. 어쩌면 수많은 교회들과 교인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신다(눅 10:20). 주님의 성도들은 땅에서는 이름 없는 꽃이지만, 하늘에서는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들이다. 

 

그들의 이름은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이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주와 주의 나라가 중요할 뿐이다. 그들은 오직 주님 안에서만은 의미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주님 안에서만 자기 존재의 의미를 발견한 자,, 술람미 여인의 고백처럼 들에 피어나는 들꽃과도 같이 이름 없는 존재다. 왕궁의 정원에 화려하게 피어있는 꽃이 아니라, 들에 조용히 피어 있는 꽃이다. 들에 피어있는 꽃이니 돌보는 사람이 없다. 샤론평야의 수선화는 사람들을 의지하는 꽃이 아니다. 오직 주님의 보살피심에 의지하는 꽃이다. 주님의 돌보심과 은혜 안에서만 피어나는 꽃이다. 

 

샤론의 수선화,,, 그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자랑하지 않는다. 이름 없이 들풀 같이 살아간다고 해도, 주님 안에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발견했기에, 더욱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이다. 그들은 주님의 것이요, 주님께서 직접 기르시고 돌보시는 샤론의 수선화다. 

 

골짜기의 백합화,,, 골짜기의 백합화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골짜기에서 묵묵히 피어나는 백합화다. 보는 사람이 없고, 인정해주는 사람이 없어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백합화다. 골짜기와 같이 척박한 환경 가운데서도 아름답게 피어나는 백합화다.

 

골짜기는 고난을 상징하기도 한다.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시 23:4, 공동번역) 주님의 돌보심과 보호하심 가운데 있기에, 고난의 골짜기에서도 아름답게 피어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골짜기의 백합화다. 

 

주님의 성도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피어나는 들꽃이다. 척박한 골짜기, 고난의 골짜기에서도,, 아름답게 피어나는 백합화다. 

 

그들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곳이 들판이든, 골짜기든, 있는 자리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믿음의 꽃들이다. 샤론평야와 같은 들에 있든지, 눈에 띄지 않는 골짜기에 있든지, 척박한 고난의 골짜기에 있든지,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든지, 그 자리가 주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땅이다. 

 

그들은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든지, 주님께서 주신 자리에서 묵묵히 아름답게 피어나는 믿음의 꽃들이다. 그들은 이름 없는 작은 십자가의 무게를 아는 자들이다.

 

 

채원병 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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