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에베소서 2:1~10
엡 2:1-10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은 존 웨슬리회심 281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지난 주간에는 우리가 남태평양지방 웨슬리회심 기념집회를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눴습니다. 웨슬리 회심 기념 주일이라는 것이 원래 감리교회에서 신앙 생활하시던 분들은 익숙한 말이고, 장로교회나 다른 교단에서 신앙 생활하시던 분들은 조금 생소하실 수도 있으실터인데, 이미 아시는 분들은 다시 한 번 되새기고, 잘 모르시는 분들은 함께 조금 알아가는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가 감리교회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존 웨슬리목사님에 대해서, 그리고 감리교회에 대해서, 또한 초기 한국교회에서 차지한 감리교회의 위치에 대해서도 함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감리교의 창시자는 존 웨슬리 목사님입니다. 여기서 창시자라는 말은 신학적으로 감리교의 교리를 만들었다는 것이지, 어떤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는 건 아닙니다. 장로교 교리는 칼빈으로 시작되죠. 이와 같습니다. 원래 존 웨슬리 목사님은 영국성공회 신부이자, 종교개혁자이면서 사회운동가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런던 시내 올더스게잇 거리에서 모라비안 집회에 참석했다가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존 웨슬리의 회심입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은 그 날의 일기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한 모라비안 교도들의 작은 집회에 참석하여 누군가가 읽던 루터의 로마서 주석의 내용을 들었다. 나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부분의 말씀을 듣는 중에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 때가 1738년 5월 24일 저녁 8시 45분이었습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은 말을 타고 열심히 복음을 전합니다. 하루에 보통 네다섯 차례나 야외에서 설교를 하였고, 평생 4만 2천 번의 설교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제가 보통 일주일에 이렇게 예배설교만 아홉 번 정도 하는데요. 일 년이면 500여번, 4만 2천 번 하려면 80년 동안 해야 합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은 매년 12,000킬로미터를 넘게 이동하면서 설교를 했고, 평생 40만 킬로미터를 이동하면서 설교를 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791년 3월 2일에 친지들에게 “평안히 계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88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감하였습니다.
한국교회는 보통 뜨거운 은혜를 체험하는, 체험적인 신앙을 강조하는데, 이 역시 웨슬리에게서 나온 신앙 유형입니다. 감리교 말고도 성결교, 순복음, 구세군은 다 웨슬리신학을 따릅니다. 한국 최초의 선교사 아펜젤러나 언더우드 역시 모두 웨슬리식 경건주의적 복음주의자들이었습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한국교회의 주류 신앙 유형을 형성한 신학은 웨슬리신학이지만, 아직도 한국교회는 철저히 웨슬리적이지 못한 요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믿음은 강조하지만 행함이 부족합니다. 믿는 자라면 내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구원 받은 자리 거기에만 머물고 끝나는 겁니다. “은혜 받고 그 자리에만 머물러 있으면 하나도 변하는 게 없다.” 원래 감리교회의 신앙은 말씀을 통한 나의 영적인 변화, 나아가 내 이웃의 변화, 이를 통한 사회적인 성화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감리교인으로서 살아간다면, 구원의 확신뿐만 아니라, 삶의 변화가 있어져야 하고, 이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켜나가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받는 모든 축복은 다 하나님의 은혜, 부요하심과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격이 없음에도 값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 넣으사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음껏 행복을 누리며 살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은혜입니다. 이것을 감리교 교리로 말하면 선재적 은총입니다. 오늘 2절 말씀처럼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음에도, 그럴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예수님을 이 땅 가운데 보내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것이 바로 선재적인 은총입니다.
그렇다면 죄인된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우리의 죄를 대속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공로를 가지고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죄의 해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이러한 대속의 사역을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습니다. 이를 믿는 자에게 구원이 임합니다. 따라서 은혜는 구원의 원천이요, 믿음은 구원의 조건입니다. 이 모든 은혜가 우리 안에 주어졌음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 은혜를 내 것으로 받아 누리기 위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첫 번째로,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오늘 1절에 보면 이러한 선포로 시작됩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우리를 위한 구원의 역사임을 선언함으로 오늘 본문이 시작됩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5절까지 1절의 선언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내용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모든 인류에게 베푸신 은혜, 즉 선재적 은총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조지아주 선교를 마치고 돌아와서 자신의 신앙에 대한 회의가 들었습니다. 그전까지 웨슬리 목사님은 마치 바리새인과도 같은 철저한 경건주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경건함이 예수 십자가를 향한 뜨거움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받은 교육으로 인해 형성된, 또는 성공회 사제로서의 직무로 인해 만들어진 형식적인 경건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어느 날 스팡겐베르크라는 모라비안 지도자는 신앙의 회의감에 빠진 존 웨슬리 목사님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웨슬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그분이 이 세상의 구주이심을 압니다.” 스팡겐베르크는 재차 질문을 던졌습니다. “바로 그분이 당신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웨슬리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분이 저를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기를 바랍니다.”
웨슬리는 이 대화를 마치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갖고 있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모라비아 교도들과 계속해서 교제하던 중에 올더스케잇거리의 한 모라비아교도 집회에서 회심을 체험하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마음의 뜨거움과 확신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구원의 주가 되시고, 나를 위해 죽으셨고, 이로 인해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생명과 죽으심과 부활의 공로를 신뢰하고,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입니다.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그 사랑, 그 사랑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참된 믿음을 소유한 우리의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얻는 구원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았다고 할 때의 구원은 무엇보다도 현재의 구원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아니 모든 시대에 있는 성도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한 것이 아니라, 오늘 8절의 말씀처럼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라고 선언합니다. 이미 구원받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역사는 과거의 모든 죄에서의 구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칭의”입니다. 또한 우리가 얻는 구원의 의미는 죄에서만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서 구원받은 자는 두려움에서도 구원을 받습니다. 따라서 이제 더 이상 우리들은 두려움과 낙심에 빠질 이유가 없습니다. 죄에 묶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모든 죄와 두려움에서 구원 받았습니다. 지금도 그 구원의 은혜 속에 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구원의 은혜는 우리의 삶 가운데 완성되어질 것입니다. 우리에게 임한, 또한 임할 구원의 의미를 바로 깨달아 알고, 하나님께 늘 감사하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구원 받은 자로서 합당한 삶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얻는다고 설교하는 것은 성결이나 선행을 반대하는 것이 아닌가?” “삶적인 의로움을 너무 간과하는 것이 아닌가?” “구원만 받으면 삶은 어떠해도 상관없는가?” 오늘 10절에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구원 받은 자는, 하나님의 사람을 지으신 본래 목적을 행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선한 일을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구원의 과정과 신앙의 삶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처음에 내가 예수님을 알고, 믿을 때에, 내 죄를 회개함으로 주님을 내 안에 모셔 들입니다. “회개와 믿음”이죠. / 그 다음에는 내가 세례를 받고, 구원 받게 됩니다. 이 때 “칭의”가 선포됩니다. “구원과 칭의”죠. / 이제는 내가 구원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 과정을 성화라고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함께 한 우리 성도님들 대부분의 자리가 바로 여기, 성화의 단계입니다.
이 모든 과정이 무엇인가요? 믿는 자로서의 삶의 변화입니다. 구원 받은 자로서의 합당한 삶의 모습입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은 교회나 속회를 세울 때마다 반드시 사회봉사센터를 동시에 설립했다고 합니다. 가난한 고아들을 위해 고아원을 세우고, 공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교회학교를 세우고, 무료학교, 대학까지 설립합니다. 농민들의 삶의 향상을 위해서 농민조합과 노동조합을 만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대여금고도 만들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직업고용 프로그램도 만들었으며, 영유아 사망률 감소를 위한 의학논문도 썼고, 병든 사람을 위한 무료진료소도 운영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처럼 기억되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그것은 나만의 믿음으로 나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웨슬리 신앙을 본받아서 내 마음의 뜨거운 구원의 감격 가운데, 걸음이 닿는 곳마다 변화의 역사를 이루어야만 합니다. 그게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 감리교인들에게 요구되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주의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 주님 앞에 나와 기도할 때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 뜨거워진 가슴으로 주를 위해 충성하고, 그 뜨거워진 가슴으로 이웃을 위해 사랑을 전하고, 그 뜨거워진 가슴으로 세상을 향해 구원의 역사를 선포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거룩한 성화의 걸음을 완성해나가는 멋진, 정말 기억에 남을만한 멋진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