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기독교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에스겔 34장 11~16절 >

일요시사 0 1334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말씀은 우리 성도님들 너무나 잘 아시는 대로 다윗이 쓴 시편 23편의 문을 여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스스로를 한 마리의 연약한 양으로 비유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주관하시는 목자와 같은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우리 성도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실만한,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이 되실만한,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주관하실만한 그러한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동의하십니까? 믿고 계십니까? 만약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러한 생각을 믿음으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아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문장 하나에는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신다.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의 완성을 이루셨다. 삶의 인도자 되시는 성령님께서 지금도 나를 생명의 길로 이끄신다.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신다는 선언에는 이 모든 의미가 다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 벗어나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내 신앙의 울타리, 기독교적인 삶의 틀 속에 내가 너무 갇혀 있는 것이 아닌가? 답답함 속에서 일부러 벗어나보려 몸부림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녀는 부모님의 울타리 안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한 겁니다. 양은 울타리 안에 들어가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한 겁니다. 그렇기에 다윗이 고백하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나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 안에 거함으로, 그 울타리 안에 거함으로 하나님 주시는 평안과 기쁨과 안식을 누리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럼 우리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인도해 주시는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오늘 본문 11절과 12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에스겔이 포로로 잡혀가 있는 중에 기록한 글입니다. 남유다에 거하던 에스겔은 바벨론의 2차 침략 때에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잡혀갔습니다. 

  

34장 초반부에 보시면 나라가 망하는 길로 가고 있는데 당시 정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안위만을 위해 힘썼던 것을 보게 됩니다. 5절을 한 번 보십시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지도자들이 목자로서의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니, 모든 백성들이 갈길 몰라 방황하는 어린양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우상을 섬기고, 이리 저리 헛된 것을 바라보다가 결국은 다 망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11절에 말씀하십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거짓된 목자들로 인해 흩어지고 흩어진 양과 같은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선한 목자가 되어주심으로 찾고 찾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찾으시는 분입니다. 본문 12절의 말씀처럼 흐리고 캄캄한 날, 다시 말해 이방에 포로로 끌려와 앞길을 알 수 없는 그 때에, 절망과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양떼와 같은 백성들을 하나님은 찾고 찾으십니다. 거짓 목자들이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고 양들을 버려둔 그 때에 선한 목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고 찾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픔 가운데 있는 우리들을 찾으십니다. 절망 가운데 있는 우리들을 찾으십니다. 답답함과 캄캄함 가운데 갈 길 몰라 하는 영혼을 찾으십니다. 저 울타리 밖이 좋아 보인다며 냉큼 넘어간 한 영혼을 찾으십니다. 아직도 목자의 인도하심 안에 거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르는 이들을 찾으십니다. 영적인 어둠, 경제적인 낭떠러지, 관계의 가시덤불, 그 속에서 울고 있는 우리들을 찾고 찾으시는 하나님. 우리의 삶에 찾아오시고, 건져주시는 선한목자 되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먹이십니다. 

 

탕자의 비유에 보면 아들이 돌아오자마자 아버지가 하는 일이 있습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옷을 갈아입히고, 이어서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푸는 거죠.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고 그 즉시 하신 일이 바로 먹이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먹이는 일이라는 것은 인간의 생존과 연관된 가장 본질적인 행동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길 잃은 양과 같은 백성들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13절과 1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그것들을 만민 가운데에서 끌어내며 여러 백성 가운데서 모아 그 본토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산 위에와 시냇가에와 그 땅 모든 거주지에서 먹이되 좋은 꼴을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에 두리니 그것들이 그 곳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하나님은 친히 목자가 되어 주셔서 잃어버린 이들을 찾으실 뿐만 아니라, 좋은 우리에서 좋은 꼴, 살진 꼴을 먹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는 “먹이신다.”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이것은 단순히 먹을 것만을 해결해 주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삶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겠다는 뜻입니다. 양의 하루를 누가 책임집니까? 목자입니다. 목자의 손에 모든 것이 달려 있습니다. 목자의 손에 양의 배부름, 더 나아가 하루의 삶, 더 나아가 양의 평생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당장의 필요, 오늘 한 날의 삶, 나아가 일생의 삶이 다 목자 되신 하나님의 손에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이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주관자가 되심을 뜻합니다.

  

우리의 삶도 성경의 표현대로 광야와 같은 삶입니다. 뙤약볕이 있고, 맹수의 공격이 있고, 목 한 번 축일 물 한 방울 구하기 힘들 때도 있습니다. 지만 걱정은 누가 합니까? 양이 하는 게 아니라, 목자가 하는 겁니다. 길은 누가 정합니까? 양이 아니라, 목자가 하는 겁니다. 그리고 목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쉴만한 물가, 푸른 초장의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먹이시는 하나님!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책임지시는 하나님! 쉴만한 물가, 푸른 초장의 삶을 우리에게 예비하신 그 하나님! 감사함으로 하나님 예비하신 은혜의 자리에 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하나님은 누이십니다. 

 

잃어버렸던 양 한 마리를 목자가 찾아왔습니다. 어깨에 둘러메고 다시 우리에 넣습니다. 그리고는 살진 꼴, 좋은 꼴을 배불리 먹여 주십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양이 뭘 할까요? 누워서 자는 겁니다. 평안이 임합니다. 길 잃은 양에게는 평안이 없습니다. 배고픈 양에게는 평안이 없습니다. 갈 길 몰라 헤매는 양에게는 도무지 평안이 없습니다. 하지만 목자가 지켜주는, 우리 안에서 배불리 꼴을 잘 먹은 양에게는 평안이 가득합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삶에 이러한 평안이 늘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본문 15절을 볼까요?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당시 말씀이 선포되던 그 때는 이미 말씀드렸듯이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 있을 때입니다. 포로들에게는 평안이 없습니다. 편하게 누워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항상 생명의 위협 앞에서 두려워 할 수밖에 없고, 고된 노역에 시달릴 뿐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에도 근래에 보면 도무지 기사를 보기가 두려울 정도로 끔찍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습니다. 평안? 평안이 뭔가요? 여기 저기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범죄들이 난무합니다. 저 북녘 땅은 어떻습니까? 말로는 늘 대화한다, 함께 만나자 하면서 여전히 뒤에서 미사일을 쏘아대고, 핵을 개발하고, 긴장감을 조성합니다. 북녘 땅은 물론이거니와 한반도 땅 전체의 평안을 위협합니다. 뿐만 아니라, 저 시리아의 난민들, 심지어 우리의 가정에도 평안이 사라집니다. 

  

오늘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25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악한 짐승이 사라지게 하시고, 복된 소낙비를 내리시고, 나무가 열매 맺고, 땅이 소산을 내고, 모든 멍에를 다 벗겨주며, 다시는 이방의 노략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완전한 회복의 약속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그 모든 말씀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평안히 거주하리니.” 평안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 되어 주실 때 이러한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 허락하신 평안의 축복이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 게시물은 일요시사님에 의해 2019-11-06 14:37:16 교민뉴스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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