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3) 시력이 좋아야 행복합니다 <누가복음 10:21~24>
지난 주에 이어서 오늘도 보는 것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좀 특이하죠? “시력이 좋아야 행복합니다.” 그럼 시력이 안 좋은 사람은 행복하지 않다는 말인가요? 여러분! 시력이 뭔가요? 시력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이런 설명이 나옵니다. “시력이란 눈으로 보고 인식하는 능력을 말한다.” 눈으로 보는 것만이 아니라, 인식하는 능력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즉 깨닫는 것까지 시력이라는 거죠. “볼 줄 아는 능력” 오늘 시력이 좋아야 행복하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죠. 23절 후반부입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무언가를 바라보면서 그 안에서 의미를 찾고, 깨달음을 얻는 자가 복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제목 속에 담겨진 의미는 단순히 사물을 분간하는 시력이 좋아야 행복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선을 통해 보아야 할 것을 보고, 바르게 인식하고, 또한 깨달을 수 있어야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2019년 6월의 마지막 날인데, 활기차게 시작한 2019년도 이제 딱 절반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 세 가지를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정말 보는 것을 보는 눈, 그 복된 눈을 소유하기 위해, 좋은 시력을 가지고 행복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세 가지입니다.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우리 주변을 바라보고, 우리 주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첫째, 둘째, 셋째가 세 글자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 영적인 시력이 좋아져서 행복을 누리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번째로, 돌아봄입니다.
“돌아봄” 여기서 돌아본다는 것은 시선의 방향성이 나를 향하는 것입니다. 나의 삶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지금 한 해의 절반이 지나가는 시점입니다. 어떻게 2019년의 상반기 지난 날의 삶은 괜찮은 삶이었나요? 항상 그렇습니다. 늘 새롭게 마음을 먹고, 새롭게 결단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성취해낸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도 중요한건 찬찬히 돌아보고 점검하고 새롭게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도 보십시오. 24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여기서 보는 바와 듣는 바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자로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였고, 사명 감당을 통한 복된 증거를 바라보고, 듣고,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제자들만이 원한 것이 아니고, 제자들 전에 있던 왕들과 선지자들이 모두 원했던 것이었지만, 저들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였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온전히 순종하고 충성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눈으로 보면서도 깨닫지를 못하는 겁니다.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21절 중반에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오히려 안다고 하는 자, 내 지식이나 경험이 있다고 자부하는 자, 그런 이들은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고,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게 바라보는 자들에게 깨닫는 은혜가 임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사명을 감당하는데, 내 앞을 막아선, 내 시선을 막아선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때로는 내 개인적인 평안함이, 때로는 내 가정적인 일들이, 때로는 내 사업이나 직장의 일들이, 때로는 내 개인적인 취미나 여가적인 것들이, 때로는 내가 지금껏 누리고 있었던, 포기하지 못한 그 많은 것들이 나를 막아서서 하나님 주신 사명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예수님 나에게 주신 직임과 직분을 망각하게 하지는 않았습니까? 우리가 오늘 예배하는 중에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생각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더 나아가 버리게 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돌봄입니다.
“돌봄” 돌아봄은 나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돌봄”은 무엇일까요? 바로 내 주변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누가복음 10장에도 보면 먼저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 역사에 대해 감사하며 기뻐하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서 한 율법교사의 질문이 나오죠. 25절입니다. “예수님!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해 율법교사는 스스로 모범 답안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알려주시고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사마리아 비유에서 제사장은 이웃이 아닙니까? 레위인은 이웃이 아닙니까? 저들도 다 이웃입니다. 사실 넓은 의미로 보면 여행객을 때리고 돈을 빼앗은 강도 역시 이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강도가 되고, 한 사람은 그냥 외면하고 지나가는 사람이 되고, 한 사람은 도와주는 사람이 됩니다. 다 이웃인데, 이웃으로서 합당한 일을 한 사람은 사마리아인 한 명 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이웃이 누구입니까? 우리의 마음이 닿고 기도가 닿는 모든 사람은 다 이웃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 이웃을 향해 우리는 때로 강도 같은 자가 될 수도 있고, 외면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사마리아인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내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이웃이 되고 있으신가요? 어떤 이웃이 되어야 할까요?
험악한 세상이라고 하지만, 이기적인 세상이라고 하지만, 자기만 아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세상에 보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사랑의 손길을 베푸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뭔지 잘 몰라도, 성경의 가르침이 뭔지 잘 몰라도, 그저 마음에서 우러나는 인간된 도리로서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도 참 많습니다. 그에 비해 믿는 자라고 자부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어떤가요?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돌보는 건 이런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나요? 알아듣기 힘들만치 심오한가요? 너무나도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그래. 그럼 너도 가서 그렇게 하려무나.”
우리는 누구나 다 서로에게 이웃입니다. 다만 때로 강도와 같은 자가 될 수도 있고, 때로 외면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모습에 설 수도 있고, 때로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도 있을 뿐이죠. 어떤 이웃이 될 것인지,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돌봄”, 우리가 먼저 이웃을 돌아보고 사랑함으로 선한 이웃되는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한 이웃이 되어 주시는 은혜를 누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봄입니다.
“봄” 처음에 말씀드린 “돌아봄”은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어서 “돌봄”은 우리 주변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죠. 그럼 마지막 “봄”은 무엇인가? 우리가 믿는 자로서 바라볼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눈은 뜨여 있는데, 오히려 영적인 눈은 감겨 있지는 않습니까? 육적인 눈으로 세상의 헛된 것을 바라보고, 오히려 보지 말아야 할 것만 그렇게 바라보고 싶어 하면서 영적인 눈은 감은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들은 보라는 것은 안 보고, 보지 말라는 걸 그렇게 보고 싶어 합니다. 들으라는 것은 듣지 않고, 듣지 말아야 할 것에 그렇게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다보니 오늘 말씀하는 것처럼 “너희 전에 있던 왕들이나 선지자들이 그렇게 보고 싶어 했지만, 보지 못하고, 듣고 싶어 했지만 듣지 못했다.” 헛된 것만 자꾸 들으려 하고, 보려고 하다 보니까, 정작 보아야 할 것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 듣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계속 말씀하시죠.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라.” 듣고자 하는 자세, 보고자 하는 자세가 준비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누가복음 10장을 마무리하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도 한 번 보십시오. 마르다는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분주한 나머지 마리아를 나무라며 예수님께 청합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한 답변으로 41절에서 말씀합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삶의 어수선함 가운데 시선을 빼앗기거나, 세상의 헛된 욕심의 소리들 가운데 내 청각을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선택하든 그것은 나의 몫입니다. 오늘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시선을 고정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청각을 고정한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오직 예수님을 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눈이 복된 눈이 되어집니다.
육적인 시력은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하면 다시 좋아지는 건 쉽지 않다고 하지만, 영적인 시력은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먼저는 나 자신의 모습을 “돌아봄.” 더불어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돌봄.” 그리고 오직 우리 주 하나님을 “봄.”으로... 시력이 좋아야 합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복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정말 행복한 삶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