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림교회 고성환 목사 -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

기독교


 

광림교회 고성환 목사 -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

일요시사 0 1950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아름다운 전통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나이가 많아 세상을 떠날 때쯤 되면 아들들을 모두 불러놓고 축복을 해주는 전통입니다. 기독교는 구원과 축복의 종교입니다.

창49장에 보면 야곱이 세상을 떠날날이 되어 자손들을 모아놓고 유언하고 축복하는 내용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12명의 자손들 가운데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자녀는 요셉입니다. 창49:22절에『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라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샘곁’이라는 표현은 그 축복이 한없이 풍성한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에는 중동지방은 물이 귀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양을 치는 목자들이 우물 때문에 서로 다투며 전쟁을 하기도하고 물을 얻기 위해서 이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샘곁에 무성한 가지는 축복의 상징이였습니다.

요셉의 생애를 보면 어려움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곁에 계셔서 형통한 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축복을 자신만 누리고 살아간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는 삶을 살았습니다.

요셉은 그런 축복을 받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 이였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하루는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동물이 동물을 잡아먹고 식물이 식물을 잡아먹는 이상한 꿈이였습니다.(창41장) 애굽의 점술가들과 학자들을 불러 꿈 해석을 했지만 아무도 바로 왕에게 시원한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에 마침 술 맡은 관원 장이 요셉을 떠올렸습니다.

요셉이 바로왕 앞에 서는 순간이였고 바로의 꿈을 시원스럽게 하나님의 지혜로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 때에 바로왕은 신하들 앞에서 ‘요셉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다’ 라는 선언과 함께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였습니다.

요셉이 이렇게 애굽에서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살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요셉은 자신에게 닥친 고난과 어려움을 믿음으로 잘 이겨냈습니다.

요셉의 생애를 보면 예수님의 그림자와 같고 예수님의 삶의 모형과도 같습니다. 요셉은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지만 종으로 산 것이 아닙니다. 신분은 종이였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요셉은 죄수로 감옥에 갇혔지만 죄수로 살지 않았습니다. 몸은 감옥에 갇혀서 죄인들과 함께 있었지만 죄인들 속에서도 그는 의인으로 살았습니다. 요셉에게 있었던 믿음의 결과입니다.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부분들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사람의 성품입니다. 한 사람의 성격을 알아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안다 싶은데 전혀 몰랐던 성품이 튀어 나오기도 합니다. 또 하나는 사람의 생각입니다. 이것 또한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잘 모를 것이 있는데 그건 바로 그 사람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확실히 해야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의로운 믿음과 신앙이 있어야 복을 받습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어떤 상황에서도 누가 보더라도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 믿음의 아름다움이 있다면 행복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요셉이 감옥에 있을 때 자신의 꿈 해몽으로 살아 나간 술 맡은 관원장이 자기를 잊어버려서 도와주지 않았어도 그는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요셉을 사랑하셨고, 애굽의 총리로 세워 주셨습니다. 요셉은 철저하게 혼자였습니다. 그에게 버팀목이 되어준 것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이였습니다.

요셉은 믿음과 신앙의 부자가 되고 건강과 경제의 부자가 되고 기적과 형통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닥친 고난과 어려움을 믿음으로 잘 이겨냄으로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 인정을 받았습니다.

둘째로,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과 생각을 잘 지키며 사는 사람이였습니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 시각이 있습니다.

①내가 나를 보는 시각입니다. 내가 나를 보는 시각은 가장 정확한 시각일 것 같은데 가장 부정확한 시각입니다.

②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각입니다. 이 시각은 객관화 된 시각입니다. 그러나 그 바라보는 기준이 역시 주관적이기 때문에 완전히 정확한 시각은 아닙니다. ③하나님이 나를 보시는 시각입니다. 이 시각이야말로 가장 정확하고 완벽한 시각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나의 중심의 마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있을 때에 나의 나 됨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가진 사람이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이라는 이름이 무려 8백번이나 나옵니다. 다웟이 모든 것에 행실이 의로웠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가 되었다든지,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것이 아닙니다. 다웟도 실수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다윗 왕이라고 하면 생각에 몸집도 크고 볼만한 풍채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이새의 집에 가보라, 그 집에 아들들이 있는데 그 중에 내가 선택한 자가 있느니라 하시면서 기름 부르라 하십니다.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지고 기름을 부으려고 이새의 아들 일곱을 다 보았지만 감동이 없습니다. 그래서 ‘또 아들이 더 없느냐’ 하고 묻습니다. 아들 하나가 더 있기는 있는데 들에서 양을 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외모로는 겉으로는 도저히 왕 될 재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다웟의 마음 중심에 있는 온전하고 바르고 정직한 마음을 보시고 다웟을 왕으로 선택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일먼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용모와 신장을 보지말라’ ‘외모를 보지말라’ ‘사람들은 외모를 보고 사람을 선택하지만 나 여호와는 그 중심을 보느니라’ 말씀 하십니다. 이 말씀은 곧 중심에 품은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13년의 고난의 세월이 요셉을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육의 사람이 영의 사람이 될 수 있다면 13년의 삶은 긴 시간이 아닙니다. 속사람이 겉사람을 이기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인도함 받을 수 있다면 13년의 삶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닙니다.

요셉의 애굽 이름은 사브낫바네아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자신의 일을 열어서 알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 요셉의 삶이였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삶은 큰 축복의 삶입니다.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창4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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