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침 묵상(14) - 시간을 보는 눈

기독교


 

채원병의 아침 묵상(14) - 시간을 보는 눈

일요시사 0 1569

시간을 보는 눈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땅에 묻히기까지 이 세상을 산다. 헌데 이 세상을 산다는 게 무슨 뜻일까? 우리는 대부분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살다 이곳으로 이주해 왔고, 현재는 이곳 뉴질랜드에서 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생각해본다면 우리가 세상을 산다는 것은 주어진 특정한 장소에서 산다는 뜻이다. 특정한 장소에서 각 사람이 속해있는 특수한 상황을 사는 것이다. 각 사람은 각자가 속해 있는 가정과 학교와 직장과 사회단체나 종교단체 등 관련된 사람들과의 만들어진 환경과 관계 속에서 살게 된다. 또 속해 있는 국가에서 살게 되고, 나아가서 세계 속에서 한 인간으로서 이 세상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면,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각 사람에게 주어진 인생이라는 시간을 사는 것이다. 이 세상은 눈에 보이고,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신비 중에 신비다. 시간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무한한 우주보다도 신비로운 것이 시간이다.

 그러면 시간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그 무엇이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가 없다. 시간이 있기에 우주도, 이 세상도, 우리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시간이란 우주를 담아내는 그릇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명언 중에 명언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실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이라는 그릇 안에 담겨있는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사실은 우주와 삼라만상이 시간 안에서만 존재가 가능할 수 있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만 존재를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 중에 영원히 존속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직 시간만 영원할 뿐이다.

 다시 우리의 인생으로 눈을 돌려보자. 영원한 시간 안에서 인생이란 무엇일까? 한 마디로 영원한 시간 안에서 각 사람에게 주어진 일정한 시간을 살다 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억겁의 시간 속에서 찰나를 살다 가는 게 인생이다. 영원한 시간 안에서 보면 하루살이나 우리의 인생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주어진 시간을 살고 나면 싸늘한 시체가 되어 어둡고 차가운 땅 속에 묻혀 썩어 없어진다.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던 사람도, 가난하고 고생하며 힘들게 살던 사람도, 땅 속에 묻히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각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의 종착역은 영안실이고, 차갑고 어두운 땅속이다. 이것이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인간의 필연적인 운명이다.

 그런데 유한한 시간이라는 이 세상에서의 인생을 살면서도 이미 영원한 시간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우주와 만물과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절대자이기 때문이다. 신비롭기 그지없는 시간조차도 우주를 담는 그릇으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실 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 안에도 들어와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와 만물 안에 현존하실 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들 안에서 현존하신다.

 부활과 영생은 기독교신앙의 중심이다. 그것은 단순한 신념이나 사상체계가 아니라 진리이다. 부활이란 단순히 영혼의 불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한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우주를 창조하셨다. 태초란 시간의 시작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주와 만물의 창조를 시작하신 때를 말한다. 그 창조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시간 안에서 진행형이다.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다. 창조가 완성되는 때가 있다. 성경은 그 때를 마지막 때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이 비밀을 신약성경의 고린도전서 15 51~54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하나님께서 창조를 완성하시는 날에 하나님의 성도들은 홀연히 다 변화될 것이다.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고 영원히 썩지 않을 천상적 존재로 변하게 된다. 영원한 생명이 사망을 삼키게 된다. 그리고 영원한 시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지상적 존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광된 몸을 입고 영원한 천상의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이 부활이요 영생이다.

 죽음도 성도들을 하나님의 손안에서 앗아갈 수는 없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죽음을 잔다고 표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죽음이란 주어진 인생이라는 일정 기간의 삶을 마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천상에서의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위한 잠을 시작하는 것이 죽음의 진정한 의미다. 그러나 그 잠은 영원한 잠이 아니다. 사람이 저녁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듯이, 마지막 날에 깨어나는 잠이요, 영원한 시간 속에서 전혀 다른 삶을 시작하기 위한 잠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이란 영원한 시간을 바라보는 삶이요, 영원 안에서 현재라는 주어진 인생을 사는 삶인 것이다. 성도는 이미 현재의 삶 속에 영원한 생명을 품고 있는 것이며, 영원한 시간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 18절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을 영원함이라

 보이는 세계가 보이지 않는 시간 안에 담겨 있듯이, 보이는 현재의 삶도 보이지 않는 영원한 시간 안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죽음이 없기에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성도란 이미 죽음을 초월한 영원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성도란 보이는 것 너머 영원한 시간 안에서, 눈에 보이는 현재라는 주어진 삶을 사는 사람이다.

채원병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채원병목사는 리무에라에 있는 오클랜드정원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다. 신앙상담을 원하시는 분은 09) 410 5353, 021 154 3398로 연락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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