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를 예배되게 하라 ;광림교회 정존수목사

기독교


 

예배를 예배되게 하라 <느 12:27-43절 >;광림교회 정존수목사

일요시사 0 1818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느 12:43)

세계적으로 한국의 교회만큼 예배가 많은 교회는 없습니다. 제가 다닌 미국의 한 교회는 그 좋은 예배당을 일 주일에 딱 한번 사용합니다. 반면, 한인교회들은 일 주일에 적어도 열 번은 예배를 드립니다. 그걸 보면서 “이렇게 열심히 예배하기에 하나님이 이 백성을 축복하시는구나.”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예배”에 위기가 왔습니다. 예배는 참으로 많은데, 예배다운 예배를 찾기가 매우 힘듭니다. 오늘날 신앙의 위기, 교회의 위기를 말하는데, 이 위기는 다름 아닌 예배의 위기입니다.

북한의 지하교회를 들어보셨나요? 북한의 지하교회에서 예배는 목숨을 거는 행위입니다. 북한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발각되면 혼자만 죽는 게 아니라 팔촌까지 처형을 당합니다. 왜 그들은 목숨을 걸면서 까지 예배를 드리는가? 그들에게는 예배가 목숨과도 바꿀 정도로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찬송도 크게 부르지 못하고, 목 놓아 기도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배 내내 눈물과 감격이 마르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는 자유롭고 편안하게 예배드리지만 과연 우리는 바른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실만합니까?

한국에 있을 때 저희 아이가 중학교 다니면서 하루는 우는 것입니다. 왜 우는가 물어봤더니 공부가 잘 안 되서 답답하니까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예배가 잘 안 드려진다는 것은 학생이 공부가 안 되는 것 이상의 문제입니다. 예배가 잘 안 드려져서 속상해서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성도가 예배가 잘 안 된다면 울어야 할 정도가 아니라 땅을 치며 통곡할 일인 것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의 포로후기 위대한 리더였던 느헤미야가 다 무너져 완전히 훼파된 예루살렘의 성벽을 불과 52일 만에 재건하고 성벽 봉헌 예배를 드리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서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감격의 예배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야말로 예배가 예배 되는 순간입니다.

1. 예배의 바른 동기와 고백이 중요합니다.

성도는 과연 무슨 동기를 갖고 예배해야 예배가 예배답게 될까요? 한 마디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은 마음,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예배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삭개오가 그랬습니다. 세리장이었던 삭개오는 예수님이 여리고에 오실 때 예수님께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았고, 오직 예수님만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얼마나 보기를 원했든지 간에 뽕나무 위에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런 삭개오를 예수님이 먼저 알아보시고 삭개오에게 내려오라고 하시면서 그 집에 머무셨습니다. 예배의 동기가 바로 세워질 때 주님이 먼저 우리를 알아보시고 우리 마음에 임하시는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주인공인 느헤미야는 다름 아닌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은 마음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기까지 정말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성벽을 다 완성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것이 봉헌 예배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성벽을 짓고 나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은 마음을 충만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비록 그가 성벽을 짓고 나서 보니까 자기가 한 일 같지만 자기가 한 일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알았어요.

하나님께 예배하고 싶은 마음, 하나님께 나아가고 싶은 마음, 바로 이 마음이 충만할 때 예배가 예배되는 놀라운 역사가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2. 예수님의 보혈로 정결케 되어야 합니다.

30절에 보면 성벽 봉헌식 직전에 행한 중요한 일이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정결케 하는 일이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하게 하니라.” 여기에 정결하게 하는 것은 더러움을 씻고 순결하게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결 예식은 실제로 몸을 씻고, 의복을 빠는 등의 행위가 따르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즉, 거룩한 예배에 들어가는 자들은 그냥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으려면 예배에 그냥 들어가서는 안되고, 반드시 정결의 과정을 거쳐야 예배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 정결의 과정이 잘 나타난 곳이 성막의 번제단입니다. 번제단은 성막의 출입문을 지나서 가장 먼저 만나는 장소입니다. 이 번제단을 거치지 않으면 절대로 성소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번제단에서 무엇을 합니까? 백성이 자기 죄를 고백하고 양을 죽여서 피를 가지고 성소로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배로 나아가는 자들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이 예수님의 보혈을 믿고 그 보혈을 지날 때에 그 예배가 온전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3. 성도간의 뜨거운 만남과 교제가 예배를 예배 되게 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이 성벽 봉헌식은 굉장히 특이하고 놀라운 광경입니다. 31절부터 43절까지 그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누가 이걸 기획했는지 참으로 놀라운 영적이 의미가 있습니다.

31절에 보면 성전 봉헌 예배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성벽 위에 올라가서 진행되었는데 성벽 위를 올라가는 대열이 재미있습니다. 즉, 큰 무리를 둘로 나뉘어서 하나는 오른 쪽으로 하나는 왼쪽으로 진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무리가 행진을 하다가 만납니다. 어디서 만나는지 아십니까? 40절에 보니까 두 무리가 만나는 장소는 바로 하나님의 전이었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광경입니다. 온 백성을 두 무리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행진하다가 무리가 한 곳에서 만났는데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인 동시에, 한 지체된 모든 형제들과 자매들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이런 만남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 예배가 예배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한 지체된 성도들은 생각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고 출신이 다릅니다. 그러나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다르더라도 서로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에서만큼은, 예배 자리에서만큼은 만나야 합니다. 몸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만나야 합니다.

2차 세계 대전 중에 있었던 일이다.

독일군에게 쫓기는 유대인을 숨겨 주었다는 이유 하나로,

네덜란드의 처녀 코리 텐 붐과 그녀의 온 가족은 나치 수용소에 갇히고 말았다.

끔찍한 고문으로 말미암아 그녀의 가족은 생명을 잃고 말았다.

기적적으로 그녀만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 코리 텐 붐 여사는 복음전도자가 되어

온 세계에 다니며 용서의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그녀가 용서의 메시지를 전하는 곳곳마다에서 놀라운 삶의 변화들이 일어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말씀을 듣고 큰 은혜와 감동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독일에서 그녀를 초청하여 특별 집회가 있었다.

그때 그녀의 명성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그 집회에 참석을 했다.

저녁 집회를 은혜롭게 마치고 코리 텐 붐 여사는 교회 정문 앞에 서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과 인사하며 감사의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그 때 자기 앞에 서서 손을 불쑥 내미는 노신사를 바라보다가

그녀는 너무 놀라 얼굴이 창백해지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그 노신사는 바로 자기 가족을 극심하게 고문해서 죽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처녀였던 자신의 옷을 전부 벗겨내고 온갖 고문을 하며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수모를 주었던 바로 그 전범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 코리 텐 붐 여사는

“온 세상 사람들을 다 용서해도 이 자 만큼은 내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나님께 고했다.

그녀가 그의 손을 잡고 악수를 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 때 그녀의 마음속에서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얘야! 난 그 사람까지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졌단다.”

그녀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나서 그 즉시 마음속으로 회개했다.

놀라운 주님의 사랑과 용서의 은혜를 다시금 마음속 깊이 깨닫고

그를 용서할 수 있었다.

그리곤 코리텐 붐 여사는 그 노신사와 용서의 악수를 하면서

무거운 마음의 짐을 모두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큰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고 한다.

NZ광림감리교회 정존수 목사

0 Comments
제목
광고 Space available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KakaoTalk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