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적인 신앙으로 신앙의 최고봉을 이루라. 마 15:21-28 (광림교회 정존수 목사)

기독교


 

적극적인 신앙으로 신앙의 최고봉을 이루라. 마 15:21-28 (광림교회 정존수 목사)

일요시사 0 2620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6-28)

캐나다 밴쿠버에 스탠리라는 공원이 있는데 이곳은 삼나무 숲이 유명합니다. 나무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위로 쭉쭉 뻗고 얼마나 우람하지 모릅니다. 그런데 2006년, 시속 100km의 강한 폭풍이 이곳을 강타해서 수천 그루의 나무가 쓰러졌습니다. 저는 뽑힌 나무들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크고 우람한 나무들이 1m가 채 안 되는 잔뿌리들만 있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이 지역이 너무 기후도 좋고 토질이 좋은 나머지 나무들이 깊이 뿌리를 내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아도 얼마든지 위로 높게 우람하게 자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강풍이 한번 부니까 한 번에 다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겉보기에 아무리 좋아 보이는 신앙이라 할지라도 뿌리가 약한 신앙은 인생의 폭풍이 몰아칠 때 그것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신앙이 되어야 하는가? 뿌리가 깊은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의 뿌리 가운데 귀한 전통 중의 하나가 적극적인 신앙입니다. 적극적인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적극적인 신앙은 신앙의 핵심이요 본질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신앙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만나셨던 사람들 중에서 주님이 그 믿음을 인정하시고 기뻐하셨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공통적인 자세가 뭔가 봤더니, 그들은 하나같이 적극적인 신앙과 자세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리고 세리장인 삭개오는 예수를 보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고 키가 작아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삭개오를 내려오라고 하셨고 집에 유하셨습니다. 소경 바디매오는 어떠했습니까? 그는 길에 있다가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는 그분을 만나야 한다는 열망을 갖고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얼마나 적극적으로 소리를 질렀든지 주위 사람들이 나무랄 정도였습니다.

막 5장에 보면 열두 해 동안 혈루증 앓던 여인이 무리 가운데 끼여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댑니다. 여인 믿음이 얼마나 적극적인가 보세요. “내가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낫겠다.”는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가요? 이들의 믿음은 하나같이 적극적이었어요. 문제를 안고 주저앉고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내가 주님께 가기만 하면 내가 가진 문제를 반드시 해결 받으리라” 적극적인 믿음을 가졌을 때 예수님이 그들의 믿음을 인정하셨고 기뻐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참 믿음은 그 신앙이 적극적인 신앙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에 적극적으로 응답하였습니다. 반대로, 소극적인 자세는 참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과 그 말씀에 대해서 소극적인 것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눅 18장 에 보면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님은 그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했더니 청년이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영생의 비결을 말씀하셨지만 말씀을 듣고 믿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순종하지 못한 것입니다.

2. 예수를 향해 달려 나가는 신앙이 적극적인 신앙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두로와 시돈이며 주인공은 가나안 여인입니다. 이 두로와 시돈이란 지역이 유대인들을 싫어하고 원수 시 하던 지역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지역에 오셨을 때 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아마도 굉장히 냉랭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음에도 환영은커녕 적대시했을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질 수 있었을까요? 바로 한 가나안 여인이 그 복음의 통로가 되었어요. 22절에 보니까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를 질렀다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 앞에서 냉랭하고 적대시하고 소극적이던 그 무리 가운데서 한 여자가 예수께 달려 나아왔다는 것입니다. 참 신앙은 구원의 주이신 예수님을 보고 머뭇머뭇 거리는 신앙이 아니라 그 앞에 달려 나가는 신앙이 적극적인 신앙인 줄로 믿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복음이 바로 적극적인 믿음을 가진 이 가나안 여인을 통해 증거 되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교회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며 복음의 역사를 가져오는가? 지극히 인간적이고 냉랭하고 소극적인 다수가 아닙니다. 가나안 여인처럼 예수님께 적극적으로 달려 나아가는 적극적인 믿음의 소수가 하나님 나라의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 보고 어떻게 했습니까? 다른 제자들은 두려워서 떨고만 있었어요. 아무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달랐어요. 그는 적극적이었어요.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여 오라 하소서.” 하면서, 적극적으로 주님께 달려나갔습니다. 그는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그랬을 때 주님이 베드로에게 오라 하시니 그가 물 위를 걷게 된 줄로 믿습니다.

3. 어떤 난관에도 물러서지 않는 신앙이 적극적인 신앙입니다.

본문의 여인은 용기 있는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유대인을 적대하고 원수시 하던 분위기에서 자기 홀로 예수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에게 또 다른 큰 문제가 가로 놓입니다. 그렇게 믿고 소망을 가졌던 예수님이 이상한 것입니다. 23절 보니까 여인의 간구에 예수님이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게다가 예수님이 입을 열어 하신 말씀은 여인의 모든 믿음과 소망을 좌절케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예수님은 여인의 간구를 거절하셨을 뿐 아니라 여인을 개에 비유를 하셨습니다. 여인은 큰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예수님께 소망을 가지고 나왔는데 예수님이 거절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때가 있습니다. 기도해도 아무 응답이 없는 때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한 집사님의 고백이 “이상합니다. 전에는 안 그랬는데 이상하게 응답을 안 해 주세요.” 맞습니다. 그게 신앙생활의 현실입니다. 여인의 당한 현실은 바로 우리 현실입니다. 응답이 없고, 내가 한없이 내동댕이쳐지는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문은 정말 큰 은혜가 되는 본문입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여인이 이 난관을 헤쳐 가는 모습은 좋은 사례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인의 대답이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여인의 믿음이 무엇이 대단한가 하면 물러설 만도 한데 물러서지 않고, 뒤로 자빠질 만도 한데 자빠지지 않아요. 바로 물러서지 않는 믿음으로 나갔을 때 그는 예수님께 큰 믿음이라고 인정을 받고 문제를 해결 받은 것입니다. 물러서지 않는 믿음이 바로 적극적인 믿음인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이와 같은 적극적이고 물러서지 않는 믿음으로 신앙의 불모지에서 신앙의 높은 최고봉을 이룬 것입니다. 오늘도 이와 같은 적극적인 믿음으로 주님의 인정을 받는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뉴질랜드 광림감리교회 정존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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