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한 창조의 원리( 요 10:9-10, 15:4-5)-광림감리교회 정존수 목사

기독교


 

풍요한 창조의 원리( 요 10:9-10, 15:4-5)-광림감리교회 정존수 목사

일요시사 0 2420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10:9-10)


우리 하나님은 풍성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풍요하고 풍성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사랑하시기에, 성도는 가난해야 하고 교회도 작은 교회가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가난한 자도 동일하게 사랑하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가난을 기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절대, 우리가 가난하고 궁핍하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 10:10절에 주님이 오신 목적이 나와 있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 왜 이 땅에 오셨는가? 나에게 생명을 얻게 하시려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가슴이 뛰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오신 두 번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요 15:15에서도 주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거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면 열매를 많이 맺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풍성한 삶입니다.

그렇다면 풍요한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합니까?

1. 풍요한 삶에는 무엇보다도 그 삶에 변하지 않는 높은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눅 12장에 보면 한 부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거부였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이 부자가 “내가 소출이 심히 많아서 쌓아둘 곳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이 부자는 단지 부유하기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모르고 이웃도 모르고 그냥 가진 것만 많았어요. 우리는 이 부자를 가리켜 그냥 부유했다고 말하지, 풍요하고 풍성한 삶을 살았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요? 그의 삶은 삶의 높은 목적과 가치가 없이 그냥 돈만 많았어요. 하나님이 그에게 “내가 네 영혼을 오늘 도로 찾으리니 네 재물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습니다. 삶의 목적과 가치 없이 소유의 넉넉함만 추구하는 인생은 지극히 허무하고 비참한 결말을 맞이한다는 말입니다.

아프리카의 성자로 유명한 슈바이처 박사는 정말 위대한 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 분은 원래 의사가 아니었고, 명성이 높은 신학교의 교수였습니다. 그는 음악에도 탁월하였습니다. 30세가 되던 해에 갑자기 슈바이처가 그 유망하고 편안한 교수직을 버리고 선교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이해를 못했습니다.

슈바이처가 이런 결심을 하게 된 데에는 어렸을 적의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소년이었을 때 가난한 집 아이와 싸움이 붙었는데 슈바이처가 이겼습니다. 슈바이처가 그 아이를 쓰러뜨리고 배 위에 올라탔습니다. 그 승리의 순간에 밑에 깔린 아이가 내뱉은 말이 “나도 너처럼 고기 수프를 먹는다면 너를 이길 수 있어”였습니다. 이 말에 슈바이처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세상에는 내가 매일 누리는 걸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있구나.” 슈바이처는 그 이후로 가난하고 헐벗은 이들에 대한 책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드디어 1898년 성령강림절인 주일 아침에 묵상을 하는 가운데 위대한 결단을 합니다. “나는 서른 살까지는 학문과 예술을 위해 살고, 그 이후는 인류에 직접 봉사를 하리라.” 슈바이처의 삶에 높은 인생의 가치와 목적이 세워진 것입니다. 그 후 의학공부를 마치고 아프리카로 가서 흑인들을 돌보는데, 아프리카의 성자로 불릴 만큼 그들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생애야말로 풍요한 생애요, 풍성한 창조의 삶이 아닙니까? 풍요한 삶을 살아가려면 무엇보다 바르고 높은 인생의 가치관을 세워야 합니다.

2. 풍요한 삶을 위해서는 그 삶에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감사의 원리)

성경에서 가장 풍요한 창조의 드라마가 무엇인가 하면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그런데 이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에 대해 축사하셨습니다. 축사라는 것은 쉬운 말로 감사입니다. 사실 오병이어는 감사 거리가 아닙니다. 수만 명 앞에 놓인 오병이어는 한숨이요 절망입니다. 그럼에도 감사하셨을 때 거기에 놀라운 풍요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기적이 언제 이루어지는지 아십니까? 도저히 감사할 수 없고, 한숨이 나오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조건과 환경 속에서도 감사를 할 때입니다.

마중물이란 것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시골에 가면 집집마다 펌프가 있는데, 그냥 펌프질을 하면 아무 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물 한 바가지를 붓고 나서 펌프질을 하면 그제야 물이 나옵니다. 그게 바로 마중물입니다. 말 그대로 물을 맞이하는 물입니다. 물 한 바가지를 부으면 그 물이 내려가서 물 한 바가지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한 물을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펌프질을 할 때도 마중물이 필요합니다. 어떤 마중물입니까? 바로 감사의 마중물입니다. 감사를 부을 때 비로소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풍요한 창조의 기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3. 풍요한 삶을 위해서는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씨앗의 원리)

씨앗이 땅에 심겨지면 씨앗은 죽고 없어집니다. 씨앗이 온데간데없어요. 그런데 씨앗이 죽은 자리에서 새로운 형체의 생명이 자라서 수백 개의 열매를 여는 것입니다. 그 수백 개의 씨앗이 죽어지면 또 거기에서 수천, 수만 개의 열매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사과 하나를 믿음으로 보면 그 안에 수천, 수만의 사과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게 심어져서 죽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풍성한 삶의 기적을 바라는 사람은 반드시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씨앗을 심지 않고서 열매를 기대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씨 뿌림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기적이었습니다. 어떤 씨 뿌림인가요? 한 소년이 자기의 오병이어를 심은 것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희생입니다. 하루 종일 굶은 아이에게 도시락은 생명 그 자체에요. 어린 아이의 희생이라는 씨 뿌림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풍요한 기적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풍요한 창조의 삶을 살기 원한다면, 오늘 나의 삶에서 그 창조와 기적이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뉴질랜드 광림감리교회 정존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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