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25-37) -광림교회 정존수 목사-

기독교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25-37) -광림교회 정존수 목사-

일요시사 0 1782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이스라엘에는 갈릴리 바다와 사해가 있습니다. 원래 이 바다들은 호수이지만 보통 바다라 부릅니다. 두 바다 똑같이 북쪽의 헐몬산으로부터 맑고 깨끗한 물을 받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바다는 고기가 많으며, 생명력이 있는 바다인 반면, 사해 바다는 말 그대로 죽은 바다입니다. 염분이 너무 많아 아무 생명체도 살 수 없습니다. 똑같이 깨끗하고 맑은 물을 받지만 하나는 생명의 바다이고 하나는 죽음의 바다입니다.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갈릴리 바다는 물을 받은 만큼 흘려보내는 반면, 사해는 물을 받기만 하고 흘려보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두 바다는 바로 우리 신앙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런데 기억해야할 사실은 하나님이 부어주신 이 은혜와 사랑이 받는 것으로만 끝나면 갈릴리 바다가 아니라 사해와 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놀라운 은혜와 사랑은 어디론가 흘려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랑을 흘려보내는 게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본문은 사랑의 실천에 관한 유명한 본문입니다.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와서는 영생에 대해서 질문할 때 예수님은 이미 “네가 알고 있는 계명을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사랑의 실천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영혼이 사는 것입니다.

1. 강도 만난 이웃에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한 회사원이 출근 버스에서 겪었던 일입니다. 한 노인이 버스에 탔는데 차비가 없자 운전기사가 매정하게 “차비 없으면 빨리 내리라”고 야단을 쳤습니다. 승객들은 운전기사에게 뭐라고 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 때 한 여자 아이가 기사에게 “할아버지잖아요!! 앞으로 이렇게 불쌍하신 분들 타시면 공짜로 10번 태워주세요” 하면서 만 원짜리를 돈 통에 넣었습니다. 이걸 보던 회사원이 자기가 어른이란 게 너무너무 창피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꼬마 주머니에 만 원짜리를 찔러 넣고는 도망치듯 뛰어내렸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충분히 도울 수 있고 도와야 하는 어른들의 방관과 한 어린 소녀의 행동하는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죽게 되었는데 그 곁을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절대 지나쳐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쓰러진 사람은 자신들의 동족이었고, 제사장과 레위인은 직책상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죽어가는 사람을 피하여 지나갔다고 기록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위기입니다. 선교의 위기이고 나아가서 존폐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 그대로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교회만큼은 강도 만난 이웃을 돌볼 줄 알았는데 피하여 그냥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또 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고 여행객이었습니다. 사실상, 이 사람은 이 강도 만난 자에 대해서 별로 책임이 없습니다. 자기 동족도 아니고, 또한 여행객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놀랍게도 그를 불쌍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동족도 갖지 못한 마음입니다. 사랑을 외치는 종교 지도자들도 이 마음이 없었어요. 바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사랑을 실천케 하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2. 강도만난 이웃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본문의 30절을 보면 강도 만난 자의 비참한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강도가 이 사람에게 어떻게 행했습니까? 이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리고, 길거리에 버리고, 모든 소유를 빼앗아 갔습니다. 그런데 오늘 강도 만난 사람은 성경에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도 인생의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만난 삶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 목회 경험 중에 참 값진 게 있다면 사회복지기관의 교회에서 미혼모들을 목회한 경험입니다. 그곳에 10대 후반에서 30대까지 임신한 미혼모들이 있는데, 그들을 상담해 보면 정말 기가 막힌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보면 본문의 강도 만난 사람처럼 한 순간 사람을 잘못 만나서 몸을 버리고, 가진 것도 다 빼앗기고, 상처투성이로 미혼모 시설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저도 그들이 이해가 안 되고 적응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놓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제게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설교를 통해서 그들의 아픔과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소망과 용기를 줄 수가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제 발로 교회를 찾아와서 예배를 사모하고 기도하고, 심지어는 그들이 성가대원이 되어서 예배를 돕기 까지 했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도 강도 만난 인생들이 있는데 어떻게 도울 것입니까? 오늘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고 그들이 낫기까지 필요한 것을 그들에게 줄 수 있어야 합니다.

3. 자기희생이 있어야 사랑의 실천을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행동에서 보아야 할 것은 자기희생입니다. 아무리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도 자기희생의 각오가 없으면 절대로 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자기의 시간을 들였습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상처를 소독하고 싸매주고 여관까지 데려갔습니다.또한 재물을 희생했습니다. 자신이 계속 남아서 치료할 수 없으니까 여관 주인에게 대신 부탁하면서 그 드는 비용을 자기가 부담했습니다.

여기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희생 없는 사랑의 실천은 절대 없다. 오늘 당신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사해가 아니라 갈릴리 바다 같은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거기에는 희생이 들어가야 합니다. 희생이 들어가야 그 사랑의 실천이 참된 것이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서울의 광림교회가 창립 60주년을 맞이해서 사회봉사관 건축을 거의 마무리하고 오는 9월에 봉헌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회봉사관 건축의 동기와 목적이 아름답습니다. 뭔가 하면 광림교회가 60주년을 맞이해서 은혜와 축복을 받았으니 이제는 사회를 위해서 뭔가 기여하는 교회가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회봉사관을 짓기 까지는 교우들의 희생이 들어갔습니다. 참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아마 이 사회봉사관이 봉헌될 때 그 성도들이 감격의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의 실천을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이 따르는데, 그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비로소 사랑의 실천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라고 물으실 때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제가 사랑을 실천하겠습니다.” 하며 나설 수 있으시기를 원합니다.

뉴질랜드 광림감리교회 담임목사 정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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