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로 네 식물을 삼으라 (창 39:1-6, 시 37:1-3 ) 광림교회 정존수 목사

기독교


 

성실로 네 식물을 삼으라 (창 39:1-6, 시 37:1-3 ) 광림교회 정존수 목사

NZ광림교회 0 3215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시 37:1-3)

“우리가 먹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매일 음식으로 섭취하는 것이 몸을 결정하고 나아가서 건강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속사람은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마태복음 4:4에 보니까 우리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에 영혼이 양식으로 삼아야 하는 또 한 가지가 나옵니다. 시 37:3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무엇입니까? 바로 성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성실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 된 삶이요 성화의 삶인 것입니다.

나라의 중요한 공직자들을 뽑는 청문회를 보면 공직 후보자들이 화려한 학력과 경력을 가지고도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어디서 무너지는가 하면 도덕성과 정직성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살아온 길이 얼마나 성실했는가를 중요하게 보는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하여도 사람들은 보기를 원하는 것은 바로 성실함입니다.


1. 성실은 곧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본문은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고 애굽으로 팔려간 후에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요셉이 이 집에서 성실 했어요. 어느 정도 성실했는가 하면 주인이 요셉을 가정 총무를 삼고 모든 소유를 위탁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그 주인이 요셉의 성실함 속에서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성실한 요셉의 모습에서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성실하시다는 증거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가장 대표적이 속성은 성실함, 신실하심입니다.

시편 89:8에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능력 있는 이가 누구리이까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 전체가 증거 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과 ‘하나님은 성실하시다.’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에 무수한 약속들을 주셨고 신약에서 정확하게 이루셨습니다. 변함없이 정확하게 운행되는 자연 세계는 무엇을 드러냅니까?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하나님이 성실하신 가장 큰 증거가 무엇인가요?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가 바로 하나님의 성실하신 최대 증거입니다. 오늘 나의 삶을 돌아보세요. 하나님의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큰가요? 하나님이 내게 얼마나 성실하셨습니까?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성실하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 우리도 성실해야 합니다.

성실에 해당하는 말은 ‘Sincere’입니다. 이 단어는 라틴어 Sine(없는)와 Cera(밀랍)이라는 단어의 합성인데 그 유래가 있습니다. 로마인들은 대리석 조각을 좋아했는데 조각가가 작품을 만들고 이따금 실수로 코나 귀가 떨어져 나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을 밀랍과 대리석 가루를 반죽해서 살짝 메꾸어서 팔았습니다. 처음에는 멀쩡하지만 날이 더워지면 떨어져 나간 부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흠이 없는 조각품에는 ‘밀랍이 없다’는 뜻으로 Cine Cera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다름 아닌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빚으시고 나서 우리 위에 사인을 하시기를 Sincere, 이 피조물은 철저하게 순수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거짓되지 않고 철저히 순수하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줄로 믿습니다.


2. 성실은 고난을 뚫는 능력이 된다.

애굽에 종으로 팔려온 요셉의 삶은 한 마디로 고난과 역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이 고난과 역경을 무엇으로 뚫고 나갔는가? 다름 아닌 특유의 성실함으로 뚫었다는 것입니다.

훈련이 험하고 혹독하기로 소문난 한 훈련소에서 장거리 구보대회를 하는데 한 훈련병이 꼴찌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얼마 쯤 가니까 갈림길이 나타났는데, 이정표에 오른 쪽은 ‘사병이 달리는 길’, 왼쪽은 ‘장교가 달리는 길’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는 양쪽을 번갈아 보면서 ‘장교가 달리는 길이 더 짧거나 편할 텐데. 보는 사람도 없는데 편한 길로 달릴까?’ 망설이다가 결국 사병이 달리는 길로 갔습니다. 그런데 30분도 안되어 목적지에 도착을 해서 놀랍게도 9등을 했습니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다른 훈련병들이 결승에 도착했는데 보니까 그들은 탈진 직전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장교가 달리는 길을 선택한 군인들이었습니다. 훈련 교관이 맨 꼴찌로 달리다가 9등을 한 훈련병에게 말합니다. “갈림길에서 자신을 속이지 않았던 성실함이 자네 무기였다네”

고난과 역경은 얄팍한 꾀로는 절대로 뚫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였어도 성실할 때 길이 열리고, 성실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도우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어려움이 있습니까? 성실하기를 바랍니다. 성실로 승부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성실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3. 성실이 능력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실이 되어야 합니다.

성실은 마치 건물의 기둥과도 같습니다. 건물에 보면 조명이나 장식처럼 화려하고 멋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둥이 가장 중요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묵묵히 건물을 지탱한 다음에라야 아름다움도 있는 것입니다. 성실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은 드러나고 화려한 일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꾸준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묵묵히 책임을 감당하는 성실함의 기둥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성실하기가 힘들어요. 우리는 성실하고 싶지만 언제나 꾸준하기는 너무 힘이 듭니다. 언제 봐도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실이 내 힘으로 감당되어지는 성실이 되면 안 됩니다. 내 의지로 만들어지는 성실은 잠간은 되지만 지속하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조금 가다가 탈진됩니다. 우리의 성실은 위로 주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되는 성실이 되어야 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충성되고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세벨의 위협을 받은 후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 성실할 힘을 잃어버리고 주저앉았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오셔서 떡과 물을 주시고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를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게 하시고 거기서 세미한 음성 가운데 만나 주시고,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자 칠천 인을 남겨 두심으로 엘리야를 격려하십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성실입니다. 엘리야의 성실로는 넘어지고 쓰러졌지만 다시 하나님의 성실을 입은 것입니다. 엘리야와 같이 하나님의 성실을 덧입음으로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뉴질랜드 광림감리교회 정존수 담임목사

0 Comments
제목
광고 Space available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KakaoTalk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