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침 묵상(35) - 행복한 바보

기독교


 

채원병의 아침 묵상(35) - 행복한 바보

정원교회 0 2474
옛날 중근동지역에 ‘행복한 바보’라는 별명을 가진 지혜로운 사람이 있었다. 하루는 길을 가다 어느 마을에 묵게 되었는데, 삼형제가 지혜를 구하러 찾아왔다.
 
“선생님, 저희를 좀 도와주십시오. 아버님께서 얼마 전에 돌아가시면서, 큰 아들은 당신께서 남기신 낙타의 반을 갖고, 둘째는 1/3, 막내는 1/9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낙타는 모두 17마리니, 1/2로 나눌 수도 없고, 1/3이나 1/9로도 나눌 수가 없습니다.”
 
“그것 참 낭패군요. 마침 내가 타고 온 낙타가 한 마리 있으니, 이 낙타를 주겠소. 그러면 문제가 쉽게 해결될 겁니다.”
 
삼형제 ‘행복한 바보’가 내준 낙타 한 마리를 받아서 큰 아들은 18마리의 1/2인 9마리를 유산으로 받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둘째는 1/3인 6마리, 막내는 1/9인 2 마리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행복한 바보’는 자신의 낙타를 내어줌으로써 세 아들의 유산문제를 깨끗이 해결해주었다. 그런데 세 아들이 나누어 가진 낙타를 세어보면 모두 17마리다. 낙타 한 마리가 남는다.
 
‘행복한 바보’가 말했다. “나도 내 낙타를 도로 가져 가겠오.”
 
‘행복한 바보’는 자신의 것을 내어줌으로써 남의 어려운 문제도 해결해주고, 자신도 잃은 것이 없었다. 기독교 신앙의 기본원리는 내어줌에 있다. 이 내어줌의 정신이 무너질 때 신앙도 무너져 내린다.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무기력한 것은 바로 신앙의 기본원리인 내어줌의 정신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사랑이나 희생과 같은 말은 오늘날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사치스러운 표현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솔직해지자. 우리에게 무슨 사랑이 있는가? 자신의 것을 내어준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일은 다른 사람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상대방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없이는 결코 자신의 것을 내놓을 수 없다. 그러나 상대방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있을 때 이 어려움은 극복이 된다. 나를 포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단지 상대방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행복한 바보’의 이야기를 좀 더 계속해보자. 선생이 이웃마을로 가자, 마을사람들이 찾아와 지혜로운 말 한 마디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자 선생이 물었다.
“여러분은 내가 무슨 말을 할 지 아십니까?”
“아니요. 모릅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해줄 말도 없습니다”
마을사람들은 모여서 의논을 하고는 다시 선생을 찾아갔다.
“여러분은 내가 무슨 말을 할 지 아십니까?”
“예, 압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지 모두 알고 계시니 해줄 말이 없습니다”
마을사람들은 다시 모여 궁리 끝에 선생을 다시 찾아갔다.
선생이 같은 질문을 하자, 이번에는 마을사람들의 반은 안다고 대답하고, 반은 모른다고 대답했다.
“반은 알고 반은 모르니, 아는 사람들이 모르는 사람들에게 말해주시오”
‘행복한 바보’는 결국 마을사람들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고 그 마을을 떠났다.
 
그는 왜 아무 말도 해주지 않고 그냥 떠났을까? 마을사람들이 진심으로 지혜를 배우고 싶어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어리석은 마을사람과 같지는 않은지 생각해보게 된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진심으로 예수님을 나의 삶의 주님으로 모시는 일이며, 예수님의 마음과 정신과 삶을 배우는 것이다. 예수님을 배우고자 하는 진실하고 간절한 마음이 우리 안에 있는지 돌이켜 볼 일이다. 이러한 간절하고 진실한 마음이 없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리석은 마을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 9:23)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자기가 삶의 주인 됨을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십자가는 낮아짐의 자리요, 내어줌의 자리이며, 자기비움의 자리다. 그러나 그 자리는 잃는 자리가 아니라, 얻는 자리다. 십자가는 버리는 자리지만, 또한 부활의 영광이 예비된 자리다. 버려야 얻을 수 있다. 십자가의 죽음이 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없다. 마찬가지로 자기 부인의 십자가를 지지 않는 기독교 신앙은 죽은 신앙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자신의 나라를 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볼 일이다.
 
손을 꽉 움켜쥐고 아멘 할렐루야를 아무리 외쳐봐야 소용없다. 땅에서 누리고 하늘에서 버림받는 자가 될 것인가, 땅에서는 버리는 자가 되고 하늘에서는 얻는 자가 될 것인가? 진지하게 생각해볼 일이다.
 
바보가 되어 보지 않고는 결단코 바보들만이 누릴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맛볼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행복한 바보들이 누리는 그들만의 천국이다.
 
채원병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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