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침 묵상(39) - ‘그것’과 ‘당신’

기독교


 

채원병의 아침 묵상(39) - ‘그것’과 ‘당신’

정원교회 0 1968
아침에 일어나면 눈을 뜨고, 밤이 되면 눈을 감는다. 눈을 뜨고 있는 동안 여러 사람을 만난다. 그런데 하루의 삶은 인생의 축소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태어나서 눈을 뜸으로써 인생이 시작되고, 눈을 감고 땅에 묻힘으로써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한다. 그리고 이 땅에 사는 동안 많은 만남을 겪게 된다. 부모와의 만남으로 시작해서 형제자매와의 만남, 친구들과의 만남으로 발전해나가고, 이후 수없이 많은 만남 가운데서 살다 가게 된다. 그 중에는 아름다운 만남도 있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만남도 있다. 또 아무 의미 없이 그저 스쳐 지나가는 만남도 있다.

살아가는 동안 겪게 되는 수없이 많은 만남은 눈으로 상대방을 보는 것으로 시작이 된다. 눈으로 상대방의 외모와 풍기는 인상을 본다. 그러나 눈은 외모나 인상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한다. 그래서 외모나 인상보다는 눈을 통해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눈은 그 사람의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마음의 호수이기 때문이다. 밝은 눈이 있는가 하면 어두운 눈도 있고, 교만한 눈도 있고 겸손한 눈도 있으며, 사나운 눈도 있고 부드러운 눈도 있다. 그런가 하면 웃고 있는 눈에도 깊은 슬픔이 베어있다. 또 굵은 주름이 깊숙이 패어있는 얼굴에도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한 눈이 있다. 이처럼 눈은 그 사람의 인생을 담고 있는 마음의 호수라고도 할 수 있고, 그 사람을 나타내는 영혼의 창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람은 눈으로 말하고 눈으로 보며 산다. 누군가를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살아온 인생을 보는 것이며, 그 사람을 느끼는 것이다.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부버는 사람들이 남들을 보는 데는 보통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사람을 ‘그것’으로 보는 것과 ‘당신’으로 보는 것이다. 

‘그것’으로 본다는 것은 은행의 ATM(현금자동인출기)를 보듯이 사람을 보는 것을 말한다. ATM은 돈을 내주는 기능을 하는 기계일 뿐입니다. 가령 카운트다운이나 파큰세이브 같은 대형슈퍼에서 살 물건을 들고 계산을 기다릴 때를 생각해보자. 한참 붐비는 때라 계산대 마다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데, 한 쪽 줄에 사람이 적어서 그곳에 섰다. 다른 쪽 줄들은 쑥쑥 빠져나는데, 자기가 서 있는 곳만 줄이 잘 줄어들질 않는다. 나보다 한참 뒤에 서있던 사람이 먼저 계산을 끝내고 나간다. 살펴보니 계산대 종업원이 초짜다. “에이~~ 줄을 잘못 섰구나. 왜 저렇게 굼뜨지?” 속이 부글부글 끓으며 짜증이 나려 한다.

이런 경우가 바로 사람을 ATM 보듯이 보는 경우다. 사람을 단지 기능적으로만 보는 것이다. 이런 경우, 계산대에 있는 종업원은 계산하는 기계에 불과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일이 일상생활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데 있다. 이와 같이 상대방을 단순히 기능적으로만 보게 될 때, 상대방을 이해할 수도 없고, 사랑이나 동정 같은 감정이 자리할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내게 잘해주면 좋고, 못해주면 싫은 관계밖에는 생기지 않는다. 상대방은 단지 나의 필요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서 사람을 ‘당신’으로 본다는 것은 상대방을 나와 똑 같은 독립된 삶의 주체로 보는 것을 말한다. 내가 나의 살아온 인생이 있고 사연이 있듯이, 상대방도 자신만의 인생이 있고 사연이 있는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상대방도 나처럼 많은 생각이 있고, 희로애락의 감정이 있는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내가 남에게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것처럼, 상대방도 나름대로의 많은 어려운 사정이 있음을 보는 것이다. 내가 어렵고 힘든 것처럼, 상대방의 어렵고 힘든 상황을 보는 것이다.

상대방을 나와 똑 같은 독립된 삶의 주체로 볼 때, 우리는 비로소 상대방을 이해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된다. 한 마디로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관계를 ‘나-당신’의 관계라고 한다.

우리의 눈은 상대방을 보기도 하고, 자신을 나타내기도 한다. 우리의 눈은 남들을 얼마나 바로 보고 있을까? 다른 사람들을 너무 ‘나’ 중심으로 보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볼 일이다. 혹시 남들의 삶도 나의 삶만큼이나 소중하다는 사실을 잊고 살지는 않은지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조차도 ‘그것’으로 보려고 한다.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 정도로 하나님을 보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외아들까지 내주시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주셨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그것’으로 보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필요를 충족시키시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지도 않으셨고, 우리를 대하지도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나-당신’의 관계로 우리를 대하신다. 우리를 독립된 삶의 주체로, 독립된 인격체로 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말할 수 없는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다. 우리의 죄악과 연약함과 아픔과 눈물을 모두 품으시고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다.
 
채원병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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