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창 18:9-15, 창 21:6) - 광림교회 정존수 목사

기독교


 

나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창 18:9-15, 창 21:6) - 광림교회 정존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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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창 21:6)

최근 한국에 취업난이 심각해지면서 대학에 나타난 현상이 이색적인 학과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동물조련학과, 골프관리학과, 카지노과 등이 그것입니다. 그 중 눈에 띄는 게 ‘얼굴경영학과’입니다. ‘이 과에서는 뭘 배우는가?’ 봤더니 웃음, 미소 짓는 법이었습니다. 웃음과 미소를 통해 얼굴을 매력있게 만드는 것이 현대사회의 중요한 경쟁력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실업자로 고생을 했습니다. 새벽마다 직업소개소에 나가 일을 구했으나 번번이 허탕입니다. 일을 구하는 사람은 5백 명이 넘는데 뽑아가는 사람은 한두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는 "도대체 그 많은 사람들 중 뭘 기준으로 한두 사람을 뽑는 것일까?“ 고민을 하다가 무릎을 탁 쳤습니다. 다음날 그는 일거리를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정답은 환한 웃음이었습니다. 환한 웃음을 짓고 있으니까 소개소 직원이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저기, 가운데서 웃고 있는 사람!" 하더라는 것입니다. 

‘웃음은 만병을 치료하는 명약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최근에 이 말이 의학적으로도 사실임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가령 ‘웃음보’라는 게 있는데 실제로 뇌에 웃음보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프리드 박사 연구팀이 뇌를 치료하다가 좌측 전두엽의 한 부위를 자극하면 어떤 상황이든 웃는 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보통, 웃게 되면 안면의 근육들이 움직이고 입이 벌어지고 소리를 내며, 복근 뿐 아니라 횡경막도 움직이고 때로는 눈물까지 나기도 합니다. 이 때 뇌하수체에서 엔돌핀이나 엔게팔린 같은 자연 진통제가 나오고 몸의 염증을 낫게 하는 화학물질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웃음이라는 게 이렇게 중요하고 놀라운 효과가 있는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현대인들이 많이 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한 연구에 의하면 어린이들은 대강 하루 4백번을 웃는 반면, 어른이 되면서 이 숫자가 6번으로 줄어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인의 비극입니다. 다 가졌고 모든 것이 안락하지만 웃음을 잃어버렸습니다. 

본문은 성경의 역사 가운데 최초로 웃음이라는 게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본문이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이 웃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들에게 선물을 주시는데 바로 웃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1. 절망의 끝에서 웃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라.
웃음도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는 ‘때문에’ 웃음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웃을 일이 있기 때문에 웃는 웃음입니다. 승진을 했기 때문에, 시험에 합격을 했기 때문에... 물론 이런 ‘때문에’ 웃는 웃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한 차원 더 올라가야 합니다.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웃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웃음은 도저히 웃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웃는 믿음의 웃음입니다.  

본문이 바로 그런 웃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주인공은 바로 아브라함과 사라인데, 이들 부부 사이에 자녀가 없었습니다. 더 절망적인 것은 이들 부부가 아이를 기대하기에는 이미 너무 늙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75세에 부르셔서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지 벌써 25년이 지났습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믿지만 너무 긴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에 아브라함과 사라는 너무 늙은 겁니다. 그래서 자식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 14절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이미 모든 게 끝난 상황이라고 절망하는 아브라함에게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 년 뒤에 하나님은 이들 부부에게 아들을 주시는데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이삭입니다. 그 뜻이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다”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로 하여금 절망의 끝에서 웃게 하시고 웃음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하늘의 좋은 기쁨의 소식을 들으라.   
기쁨 중에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는 좋은 소식, 좋은 기별을 들을 때의 기쁨입니다. 학교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오거나, 비자나 영주권이 되었다는 기별을 받을 때 그 감격은 정말 세상을 얻은 기쁨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아브라함 내외도 뜻하지 않게 깜짝 놀라는 기별을 받습니다. 18장에 보면 그들은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불러 정성껏 대접을 합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나그네들부터 하나님의 기별을 듣게 됩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내년 이맘 때 내가 돌아올 때는 네 아내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기별을 들을 때 아브라함은 그동안 잊고 살았던 소망을 다시 회복하고, 가슴 벅찬 감격이 생겼을 것입니다. 

제가 신학을 공부하던 시절에 한동안 중보기도에 대해 도전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때까지 중보기도라는 것을 몰랐는데, 중보기도를 배우면서 제 기도를 돌아보게 되고 도전을 받았습니다. 한번은 강의가 끝난 후에 한 전도사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데, 자기가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이 저에게 주는 메시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메시지가 “기도의 폭을 넓히라. 기도의 폭을 좁히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전해듣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바로 그 메시지는 제가 당시에 도전받던 중보기도에 대한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제 마음이 너무 기쁘고, 마치 남들은 모르는 보화를 캐낸 사람처럼 속에서 웃음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의 기별이 이런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세상의 소식만 들리는 삶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늘의 기별, 하늘로부터 전해오는 소식을 들을 때 참된 기쁨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확신을 가질 때 온전한 웃음을 가지게 됩니다.    
본문에서 아브라함 부부가 기쁨의 소식을 들었는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들이 있으리라는 소식을 듣고 사라가 웃었는데 그 웃음이 불신앙의 웃음이었습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12절)” 이 웃음을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사라가 왜 웃느냐?” 물으십니다. 그랬더니 사라가 15절에서  웃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라는 분명히 웃었는데, 정작 본인은 웃지 않았다고 합니다. 무엇입니까? 얼굴로는 웃었지만 마음은 웃지 않았어요. 반쪽 웃음이요 온전한 웃음이 아닌 것입니다. 

왜 사라의 웃음은 온전한 웃음이 못되었을까요? 언약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온전한 웃음, 내적인 기쁨은 말씀에 대한 확신과 감격의 산물입니다. 

나이애가라 폭포 위에서 한 남자가 줄을 타고 건넙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슴 졸이면서 그 광경을 봅니다. 곡예사가 폭포를 건넌 후에, 자기 어깨에 타고 폭포를 건널 사람을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 때 한 소년이 나서서 곡예사의 어깨에 올라앉았습니다. 놀랍게도 아이의 얼굴에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고 미소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아이는 곡예사의 아들이었습니다. 그 미소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곡예사에 대한 확신을 넘어서 무한 신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이가 곡예사를 무한 신뢰할 때 아이는 무시무시한 상황을 오히려 즐겼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웃음이 반쪽웃음이 아니라 온전한 웃음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믿음과 신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내 안에 신뢰와 확신으로 다가올 때 어떤 상황도 빼앗을 수 없는 온전한 웃음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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