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향한 눈물 (누가복음 19장 41~44절)

기독교


 

영혼을 향한 눈물 (누가복음 19장 41~44절)

NZ광림교회 0 2433
세상을 살면서 눈물을 단 한 번도 흘리지 않은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눈물은 기쁨의 눈물, 슬픔의 눈물, 감동의 눈물등 눈물의 종류도 정말 다양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눈물들은 간혹가다가 창피해서, 부끄러워서, 쑥쓰러워서, 눈물을 흘릴 감정이 복받쳐 왔는데도 그것을 참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아가면서 흘릴수록 좋은 눈물, 흘릴수록 아름다운 눈물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신뢰의 눈물, 연민의 눈물, 회개의 눈물입니다. 모두 살아가면서 많이 흘리면 흘릴수록 자신이 정화되고, 세상이 따뜻하게 되며, 영혼이 맑아지는 좋은 눈물들입니다. 참다운 사람, 인격적인 사람은 이 세가지의 눈물을 많이 흘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지금 어떠한 눈물들이 있습니까?

오늘 주인공, 바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41절 말씀에 이렇게 시작합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성이란 무엇을 뜻합니까? 예루살렘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울음은 예루살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보면서 인류의 아픔을 보고 온 세상 모든 피조물의 고난까지도 생각하면서 우는 메시야적 눈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상황은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류의 고난받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이스라엘의 고난은 인류사적 맥락과 일치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눈물은 자기 민족에 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인류가 당하고 있는 보편적 고난과 죄에 대한 애통의 눈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성경에서 가장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영혼을 울려주는 구절은 “예수님께서 우셨다” 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일생동안 웃고 사셔도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우시다니 얼마나 비통한 일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그 예수님의 눈물을 바꿀 수 있을까요? 세 가지를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평화의 길을 걷는 것이 눈물을 바꿀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시면서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42절 말씀에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이 말씀은, 즉, 예루살렘 성 안에서 서로간의 전쟁, 분쟁, 싸움, 미움, 시기, 질투, 다툼, 이러한 행동들이 엄청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이 평화롭지 못했기에 예수님께서 오셨던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도 악에 빠진 예루살렘 성을 알았습니다. 알았기 때문에 이 땅에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 말씀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평화의 길을 걷는 것만이 예수님의 기쁨의 눈물로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원수를 만들지 말고 없애야만이 예수님의 눈물도 없앨 수 있습니다. 43, 44절 말씀에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 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43~44절의 내용이 무슨 내용이냐 하면, 그냥 단순히 내 원수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원수는 로마를 뜻합니다. 즉, 로마군에 의한 예루살렘성의 함락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예언입니다. AD 70년에 디도가 이끄는 로마군이 예루살렘 성을 공격하기 위해 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위한 방책을 둘러 쳤다는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는 내용입니다. 왜 이 말씀의 내용으로 원수를 없애고 사랑하라고 말씀드리는지 아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누가 죽였는지 아십니까? 로마사람들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예수님의 원수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이게한 로마사람들이 원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스스로도 죽기 직전 그들을 용서하고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바로 이 말씀의 깊은 뜻이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가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온 민족의 대상 중에 원수 되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민족을 뛰어넘어, 다른 나라에서 까지도 원수를 만들지 말고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열방을 우리가 품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뉴질랜드에 와서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뉴질랜드가 단순히 좋아서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찾아야 합니다. 왜 뉴질랜드로 보내셨는지, 국제적인 사명을 찾아야 합니다. 열방을 품는 비전을 가지고 뉴질랜드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성전이 성전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때 예수님의 눈물이 없어집니다.  다시 오늘 말씀 처음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의 심장입니다. 이스라엘의 중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다고 했습니다. 46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하는데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습니다. 곧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처소인 하나님의 성전이 기도를 잃어버리고 영혼구원을 위한 탄식을 잃어버릴 때, 우리 주님은 탄식하시며 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무엇입니까? ‘영혼을 향한 눈물’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을 기쁨의 눈물로 바꿔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의 눈물을 닮아가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간절한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죄악 가득찬 세상을 바라보면서 ‘영혼을 향한 간절한 눈물’을 흘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이 죄악된 세상을 바라볼 때 눈물이 흐릅니까? 내 자녀만, 내 가족만 잘되고, 잘 안되면, 기쁨의 눈물, 슬픔의 눈물, 간절한 눈물만 흐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부끄럽지만 저 먼저가 그렇습니다. 세상을 바라볼 때 눈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눈물이 끊겼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영의 눈이 닫혔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바라보시고 눈물흘리시며 안타까워하였듯이, 우리들도 이제는 우리 교회만, 우리 가정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릴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그 간절한 소망과 소원을 바라보시고 우리들의 눈물의 기도를 응답해 주실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김정우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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