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기쁨이 충만한 삶(요 3:22-30) - 광림교회 정존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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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기쁨이 충만한 삶(요 3:22-30) - 광림교회 정존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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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3:29-30)

사람이 살아갈 때 가장 필요한 것이 기쁨입니다. 기쁨이 사라진 인생은 마치 시들어 버린 꽃과 같습니다. 기쁨이 사라진 얼굴은 예쁘나 예뻐 보이지 않습니다. 반대로 기쁨을 머금은 얼굴은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습니다. 

기쁨에는 속된 기쁨과 신령한 기쁨이 있습니다. 속된 기쁨은 세상의 기쁨인데, 기쁠 일이 있기 때문에 주어지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기쁨은 기쁨의 조건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지는 기쁨이기 때문에, 이 기쁨으로서는 결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반면 신령한 기쁨은 신비한 기쁨이요,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기쁜 일이 없는 가운데도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기쁨입니다.

본문에서 세례요한은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사실, 세례요한의 상황은 기뻐할 상황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새롭게 등장하심으로 자신의 시대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26절 보면 제자들이 요한에게 와서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로 몰려간다.’고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이런 상황에서 기쁘다고 말씀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기쁨을  신랑의 친구에 비유합니다. 신부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은 신랑이지만, 신랑이 신부를 맞이할 때 신랑의 친구들도 함께 기뻐하는 것처럼, 자신도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갈 때 함께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이 기쁨이야말로 신령한 기쁨이요 하늘에 속한 기쁨입니다. 성도의 기쁨은 이런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라면 내가 받아야 기쁘고, 내가 취해야 기쁜 것이 아니라, 내가 취하지 않아도, 내어줌에도 기쁜 그런 기쁨을 갖고 살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러한 기쁨을 갖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1. 시기와 질투가 없는 마음에서 비롯된 기쁨입니다. 
시기와 질투가 우리 마음에 있으면, 기쁨이 사라지고 괴로움과 고통이 시작됩니다.  사울 왕이 블레셋과 싸울 때 블레셋 군대의 골리앗이 사울 왕의 큰 골칫거리였습니다. 전장에 나가기만 하면 골리앗의 기세에 이스라엘 군대의 사기가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동 하나가 나타나서 그 골리앗을 넘어뜨린 것입니다. 다윗이었습니다. 누가 가장 기쁘겠습니까? 바로 사울 왕입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이스라엘에 패배를 안겨줬던 적장을 넘어뜨렸으니 얼마나 기쁘고 뿌듯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기쁨이 잠시였습니다. 사울의 마음에서 기쁨을 일순간에 앗아간 게 뭔지 아십니까? 바로 시기와 질투의 마음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데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가만히 들어보니까 “사울이 죽인 자가 천천이고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그 노랫소리를 듣는 순간 사울이 가졌던 그 기쁨이 일순간에 사라지고 괴로움과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기억하세요. 시기와 질투는 마치 잔디를 말라 없애는 제초제와 같습니다. 시기와 질투가 우리 마음에 생기면 기쁨을 다 죽이고, 감사를 다 없앱니다. 

한 수도사가 사막에서 영성수련을 위해 금식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본 마귀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를 유혹하여 기도를 방해하고자 했습니다. 마귀는 먼저는 음식으로, 다음에는 의심, 공포, 육욕, 물질, 명예 등으로 유혹을 했지만, 기도로 무장된 수도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약이 바짝 오른 마귀가 최후의 수단으로 수도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동생이 당신네 교구 주교가 되었다고 하네" 이 말을 들은 수도사가 그 얼굴이 금세 울그락불그락 해지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기와 질투가 우리 신앙을 파괴하는 능력입니다. 

어떻게 시기심과 질투심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세례요한은 어떻게 자기의 자리를 위협하고 사람들의 인기를 다 가져가 버린 예수님에 대해서 시기와 질투를 갖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정말 사랑하면, 그가 잘 되는 것이, 내가 잘 되는 것으로 여겨지고, 그가 안 되는 것이, 내가 안 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2. 승부욕이 없는 마음에서 비롯된 기쁨입니다.
승부욕이 무엇입니까? 누구를 이기고자 하는 마음, 누구보다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인데, 바로 이 승부욕이 우리 마음에서 기쁨을 앗아갑니다. 가령 목회할 때, 무엇이 목회의 기쁨이 되어야 하는가 하면 예수가 전파되는 게 기쁘고,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 기뻐야 합니다. 그런데 간혹, 목회자들도 목회를 승부욕으로 할 때가 있습니다. 목회의 기쁨이 예수가 전해지고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 기쁨이 되어야 하는데, 누군가를 이기고, 누군가보다 높아지는 데서 기쁨을 얻고자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이렇게 얻어진 기쁨은,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기쁨입니다. 

이런 일들이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죠. 제자들이 누굽니까? 예수님을 모시고 산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모시고 살았으니 날마다 은혜가 충만하고 기쁨이 충만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서로 누가 높은가 논쟁하고 남을 이기려는 승부욕을 가득했을 때, 예수님을 모시고도 그들 가운데 기쁨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단언컨대 누군가를 이김으로 얻어지는 기쁨은 그리스도의 기쁨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늘의 기쁨이 아닙니다. 그것은 동물의 왕국에서나 나오는 기쁨입니다. 

3. 예수가 드러나는 것이 행복이 되는 기쁨입니다.  
시간이 가면 세상의 모든 것은 낡아지고 쇠해지기 마련입니다. 우리 몸도 건강한가 싶었는데 어느 새 쇠해지고, 집도 새 집인가 싶었는데 어느 새 낡아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쇠하게 되는 것을 보면, 아쉬움이 남고 상실감이 생기고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쇠해지는 것에 대해 사뭇 다른 태도를 보입니다. 세례요한은 말하기를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해야 하리라.” 어떻게 세례 요한은 이렇게 당당히 “나는 쇠해져야 하리라”고 말씀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요한이 자기가 세상에 온 목적이 예수를 증거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자기의 쇠하여짐이 예수를 증거하고, 예수를 드러내는 것이 됨을 알았어요. 그러니까 자기의 쇠하여짐이 기쁨이 된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 그 시간들이 저로 하여금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고 나를 죽이는 과정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을 통해서 귀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를 완전히 내려놓고 나를 죽였더니, 그때에야 비로소 예수님이 드러나더라는 것입니다. 

분명한 진리는 무엇입니까? 내가 죽는 만큼 예수님이 드러나시고, 내가 사는 만큼 예수님이 감추어지는 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바로 세례요한이 말한 진리입니다.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해야 하리라”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내가 죽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떤 교회가 부흥합니까? 내가 쇠해지고 나를 죽임으로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교회가 부흥합니다. 놀라운 것은 거기에 하늘의 충만한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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