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의 쓴 물을 단물이 되게 하라.(출 15:22-27) - 광림교회 정존수 목사

기독교


 

마라의 쓴 물을 단물이 되게 하라.(출 15:22-27) - 광림교회 정존수 목사

NZ광림교회 0 3066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출 15:23-25)

지난 주간에 상상을 초월하는 강력한 태풍이 필리핀을 강타해서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런 태풍의 폐허 속에서 한 아기가 기적적으로 태어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타클로반 지역에 태풍으로 거대한 파도가 사갈리스라는 만삭된 여인의 집을 덮쳤는데, 가족들은 어디론가 쓸려가 버렸고 자신도 생각하기를 뱃속의 아이와 함께 죽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극적으로 살아서 잔해 더미에서 아이를 출산하고 눈물을 터뜨리면서 “이 아이는 나의 기적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수많은 주검이 나뒹구는 죽음의 땅에서 기적적으로 태어난 이 아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본문의 이스라엘도 극적으로 구원받은 백성들입니다. 2백만의 백성들이 홍해 앞에 왔을 때 다 몰살될 수밖에 없는 진퇴양난의 큰 위기였습니다. 앞에는 홍해요, 뒤에서는 애굽의 군대가 추격을 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지팡이를 바다로 내밀게 하셨고, 그들은 갈라진 홍해로 극적으로 애굽을 탈출하였습니다. 홍해를 건너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의 감격은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그런데 홍해의 감격 후 이스라엘이 간 곳이 다름 아닌 광야였습니다. 광야가 어떤 곳인가요? 생명을 유지하고 살기가 극히 어려운 곳입니다. 먹을 것과 물이 없고, 낮에는 태양이 뜨겁고, 밤에는 사정없이 기온이 떨어지는 곳입니다. 22절을 보니까 그들은 사흘 동안이나 길을 걸었지만 물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본문을 가지고 “마라의 쓴물이 단물이 되게 하라”는 제목으로 몇 가지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1. 하나님이 우리에게 광야를 주신 목적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인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편안히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실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셔서 물이 없는 광야로 인도하셨을까요? 

그 답이 본문 25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들을 시험하실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은 시험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험’은 마귀가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유혹, 즉 temptation이 아닙니다. 이 ‘시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닛사’인데,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 여부를 알아보기 위한 테스트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광야도 테스트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광야로 들어가게 하실 때, 광야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고자 하신 것은 가나안입니다. 그럼에도 왜 광야를 주셨는가? 가나안에 들어가기에 합당하도록 훈련하시고 단련하시는 것입니다.  

카프만이란 부인이 누에고치에서 나비가 나오는 것을 관찰하게 되었습니다. 나비가 나오려는 구멍이 너무 작았기 때문에 부인은 나비가 나오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비가 작은 구멍을 통해 긴 고통의 시간을 지내고 결국은 빠져나와 공중으로 훨훨 날아올랐습니다. 그 때 다른 나비가 나오려는 것을 발견하고서, 측은한 마음에 가위로 그 구멍을 넓게 잘라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넓은 구멍으로 나비가 쉽게 나왔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나비가 몇 번이고 공중으로 날아오르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에는 오르지 못하고 땅바닥에서 맴돌기만 했습니다. 순간, 부인은 ‘나비가 작은 구멍으로 나오려는 고통의 시간을 가져야 몸의 영양분을 날개 끝까지 공급하게 되고 날개가 강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도 하나님이 작은 구멍 같은 광야의 삶으로 인도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이유를 모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고통스런 광야의 시간을 주셨나요?” 왜 주셨습니까? 언젠가 이 광야를 지나서 강해진 믿음의 날개를 가지고 훨훨 날아오르는 신앙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오늘의 광야를 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인생의 쓴 물을 들이킬 때 절대로 원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들어갔고 그들은 사흘 동안이나 물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드디어 마라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거기 물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물을 보았을 때 큰 감격과 기대를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물을 들이키자마자 물을 뱉어 버렸습니다. 물이 너무 써서 먹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기대가 한 순간에 거품이 되었습니다. 

물이 쓰다는 사실에 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게 뭔지 아십니까? 바로 원망이었습니다. 그들은 불과 3일전만 해도 주체할 수 없는 감격으로 하나님을 찬양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원망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현상적으로 보면, 마라의 쓴물이 원인입니다. 그러나 원망의 근본적인 원인은 마라의 쓴물이 아닙니다.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라에서만 원망한 게 아닙니다. 어떤 곳에서는 먹을 것이 없다고 원망했고 어떤 곳에서는 고기가 없다고 원망을 했습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원망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마라의 쓴물과 같은 환경을 만나면 원망하고 불평할 때가 있습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로 원망하게 하는 것은 마라의 쓴물과 같은 환경과 여건이 아니라 우리의 부패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부패한 마음 중의 하나는 악한 건망증입니다. 눅 17장에 열 명의 나환자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사장에게 가다가 고침 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중 하나가 예수께 돌아와서 그 발 앞에 엎드려 감사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고침을 받은 자는 열 명인데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 나머지 아홉은 어떤 자들입니까? 그들은 받은 은혜를 기억할 줄 모르는 자들입니다. 원망을 이기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받은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3. 십자가가 마라의 쓴 물을 단물이 되게 합니다. 
모세가 마라의 쓴물로 인해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한 나무를 가리키셨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그 나무를 넣으니까 마라의 쓴물이 단물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나무는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하나는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즉 나무를 넣었더니 마라의 쓴물이 단물이 되었다는 것은 죄악으로 인하여 마라의 쓴물 같은 인생이라도 십자가를 붙들고 십자가를 만나면 그 인생이 마라의 단물과 같은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 나무는 감사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처한 여건이 아무리 쓰고 괴로운 상황이라도 거기에 감사를 넣을 때 내 삶의 마라의 쓴물과 같은 상황이 변화되어 단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처한 상황이 마라의 쓴 물과 같은 고통과 괴로움입니까? 우리 인생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고통을 짊어지신 예수님을 내 인생에 모실 때 비로소 인생의 참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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