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새로운 차원 (요 3:5-7) 광림교회 정존수 목사

기독교


 

감사의 새로운 차원 (요 3:5-7) 광림교회 정존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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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요 3:5-7)

최근 매스미디어를 떠들썩하게 장식한 것이 연예인들의 도박과 약물사건입니다. 사람들이 놀라는 것은 그들이 무명 연예인들이 아니라 최고의 주가를 자랑하며 전성기를 달리는 연예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도박이나 약물에 중독이 되는가? 한 심리학 교수가 ‘연예인들이 왜 도박이나 중독에 빠지기 쉬운가?’를 설명한 것을 보았습니다. 연예인이란 직업이 사람들에게 인기와 인정을 받는 직업이고, 그 인정과 인기가 크면 클수록 이상하게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허함이나 허탈감이 더 커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도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최고의 사회적인 신분을 가졌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공허하고 허전해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이 등장하는데 바로 니고데모입니다. 이 니고데모는 다름아닌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의 책망을 받기는 했지만 사실 백성들의 큰 존경을 받던 사람들입니다. 또한 그는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이었습니다. 이 산헤드린은 우리로 말하면 국회로서 유대의 입법과 사법의 최고 의결기관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그 공회의 의원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오늘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밤에 사람의 눈을 피해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본문을 가지고 감사의 새로운 차원이란 제목으로 몇 가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이끄심이 우리에게 감사를 가져옵니다.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의 행동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에게는 예수님을 찾게 만든 강력한 이끌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2절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한 니고데모의 고백은 당시 바리새인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고백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미움과 증오에 휩싸여 ‘어떻게 하면 예수를 죽일까?’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이었던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놀라운 고백이 니고데모 스스로 한 고백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그 마음을 이끌어주신 결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시다가 쓰러지셨습니다. 그 때 로마 군병이 구경하던 군중 가운데 구레네 사람 시몬을 끌어내어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게 합니다. 시몬으로서는 억지로 진 십자가입니다. 내키지 않는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마음이 이상하게 예수님에게로 끌리게 됩니다. 나중에 이 시몬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내 삶에 이끌림이 있다면 그것은 감사한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이끄심이 있는 삶은 가장 복된 삶입니다.

첫 추수감사하면, 우리는 청교도들이 신대륙에서 큰 수확을 거두고 풍성한 잔치를 벌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첫 추수감사는 풍요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신대륙에 도착한 때는 혹독한 추운 겨울이었기 때문입니다. 먹을 게 없고 전염병이 돌아서 102명 중에 절반이나 죽었습니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감사할 거리가 없고, 탄식만 나오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그들은 1621년 11월 넷째주 목요일에 모여서 인디언들 도움 받아서 겨우 수확한 옥수수와 음식을 놓고 예배를 드렸는데, 눈물과 감사가 뒤범벅이 된 감격의 예배가 되었습니다. 과연 그 청교도들은 도대체 뭐가 감사했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이끄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다고 생각을 하니까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흐르고, 마음 깊은 곳에서 할 수 없는 감사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감사는 환경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감사는 소유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진정한 감사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오늘까지 나를 이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2. 거듭남이야말로 감사의 가장 큰 이유입니다.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모습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바로니고데모의 영적인 공허감입니다. 니고데모는 세상적으로 가장 화려하고 성공적인 인생이었으나 영혼은 공허했습니다. 이런 영적 공허감이 무서운 게 뭔가 하면 그 이유나 실체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가진 공허감의 실체를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이 진단하신 니고데모의 공허감의 실체는 그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니고데모로서는 정말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율법과 종교생활에 으뜸이라고 자부하는 바리새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게 바로 그의 영적 공허감의 실체였습니다. 그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무엇이 중요합니까? 바로 거듭남입니다. 거듭나야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거듭나야 비로소 참 생명을 얻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10년 20년 30년 신앙생활을 해왔고, 교회에서 집사로, 권사로 아무리 봉사하고 헌신했다 할지라도 거듭 나지 않았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감사 중의 최고의 감사는 다른 감사가 아닙니다. Born again, 내가 거듭난 것에 대한 감사가 최고의 감사입니다. 거듭 났다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3. 영적인 세계가 열릴 때 감사의 세계도 열린다.

그렇다면 거듭난다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거듭나다’의 ‘거듭’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아노덴’인데 이것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다시’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위로부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용하신 것은 ‘위로부터’입니다. 즉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남은 곧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연 위로부터 태어나는 게 뭘까요? 육신의 출생이 아래로부터의 출생이라면, 위로부터의 출생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지는 은혜로 말미암은 재탄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이 거듭남의 진리를 니고데모가 이해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4절의 니고데모의 질문을 보면 그는 거듭남을 도무지 모릅니다.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니고데모는 거듭나는 것을 육체가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많이 배웠고 인텔리입니다. 그런데도 도무지 예수님 말씀이 이해가 안 되고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가요? 니고데모에게 아직 영적인 세계가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 영적인 세계가 열려야 진정한 감사의 세계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감사 중에 보면 보통 감사가 있고, 능력 있는 감사가 있는데, 그것은 도저히 감사가 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도 능력으로 감사가 나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감사의 새로운 차원입니다.

왕하 6장에서, 엘리사 집 주위를 아람군대가 새까맣게 둘러쌌을 때도 엘리사가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영적인 세계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성에서 억울하게 잡혀 매를 맞고 옥에 갇혔을 때, 찬송과 감사가 나올 수 있었던 이유도 그들이 영적인 세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언제 능력 있는 감사가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영적인 세계가 열릴 때라는 것입니다. 오늘 보이는 세계만을 바라보고 살 것이 아니라 우리 눈이 열려 영적인 세계를 볼 때 거기로부터 능력의 감사가 생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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