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침 묵상(49) - 새 해엔 낙원에 살고 싶다

기독교


 

채원병의 아침 묵상(49) - 새 해엔 낙원에 살고 싶다

정원교회 0 1716
한 해가 저물어간다. 뉴 밀레니움을 맞이하고 열네 번째 해가 저물어간다. 십사 년 전에 뉴 밀레니움을 앞두고 얼마나 요란하게 새 해를 맞이했던가. 뉴 밀레니움은 1000년과 2000년 단 두 번밖에 없었다. 지구에 살았던 사람들 중에 뉴 밀레니움을 맞이할 수 있었던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극소수에 속했다는 야릇한 자부심과 새 천 년에는 뭔가 큰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당시 로토루아에서 양모이불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불공장 사장이 되리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말이 사장이지, 기계도 돌리고, 원자재 구입에서 운반에, 물건납품에, 거래처관리와 자금조달에, 회계와 영업사원 역할까지 두루 해야 했다. 

가끔은 “내가 미쳤지, 내가 지금 여기서 무슨 짓을 하고 있나” 하는 자괴감도 여러 번 들었다. 한국에서는 사회에서 인정도 받고, 넉넉한 수입도 보장이 되었었다. 소위 잘 나가는 의사부부였다. 그런데 삶의 질을 추구한다면서 인간답게 살아보겠다고 지상낙원을 찾아 이민 짐을 쌌다. 온갖 고생을 하며 세운 병원을 뒤로 하고 이민 짐을 쌌다. 시인이 붓을 꺾는 마음으로 메스를 꺾고, 낙원을 찾아 나섰다. 병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아내를 감언이설로 달래가며 남태평양으로 날아왔다. 낙원을 찾아 날아왔다.

그런데 새 희망을 안고 찾아온 지상낙원이라는 곳에서 고작 하고 있는 일이 이불공장이라니! 공장일에, 이불배달에, 영업사원에, 형편없는 수입에,,,.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되고 있었다. 그래도 새 천 년에는 뭔가 큰 일이 일어나길 기대하며, 달빛 아래 로토루아의 호숫가를 거닐고 있었다. 십사 년 전 일이다.

새 천 년이 시작되고, 한 해, 두 해 지나가도 변한 것은 없었다. 달력에 적혀있는 숫자만 바뀌고 있을 뿐, 삶은 바뀐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상황은 나빠지고 있었다. 사업도 점점 힘들어지고, 이 짓도 이제는 그만 할 때가 됐다 싶어 결국 7년 만에 정리했다. 오클랜드로 올라와 아내가 새로 시작한 한의원 일을 도와주며 하루하루 그냥 그렇게 지냈다.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특별한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인들과 어울려 좋아하던 술이나 마시며 그렇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찮은 일이 계기가 되어 강제로 예배의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잃었던 신앙을 찾게 되었다. 성령의 임재가 느껴지면서 말할 수 없는 평강이 찾아왔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내가 너를 이 자리로 불렀다”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시험에 들어 교회를 떠난 지 근 삼십 년이 지난 시점에, 그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아니, 그 날 그 곳을 예비해놓고 계셨던 것이다. 

아홉 해 전 일이다. 낙원을 찾아 희망을 안고 찾아온 이 땅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낙원을 찾았다. 새 천 년을 맞이하고, 네 번째 해가 저물어가던 마지막 달에 있었던 일이다. 두 달 후에는 젊은 시절 육신의 부활이 믿어지지 않아 미루었던 세례도 받았다. 성탄절도 아니고 부활절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주일도 아니었다. 토요일에 선교센터 복도에서 목사님을 졸라 반강제로 세례를 받았다. 

메말라 쩍쩍 갈라진 마른 땅에 비가 쏟아져 내렸다. 천둥번개가 치며 은혜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밤마다 영혼은 몸살을 앓으며 절규하였다. 절대자를 만난 영혼은 아픈 몸살 속에 흐느끼며 부르짖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앞에서 영혼은 울고 있었다. 썩어져 가는 쓰레기 더미에서 건져 올려진 지푸라기가 되어, 그분 앞에서 울고 있었다. 악취 진동하는 시궁창에서 건져 올려진 거지가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앞에서 울고 있었다.

지금은 목사가 되어 사 년째 목회를 하고 있다. 목회를 하고 있는 지금도 나는 울고 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앞에서 울고 있다. 아직도 썩은 악취가 진동하는 내 모습에 절망하며, 그분 앞에서 울고 있다. 회 칠한 무덤 속에서 썩고 있는 시체처럼 악취가 진동하는 교회의 모습에 토악질 하며, 그 분 앞에서 울고 있다.

새 희망을 품고 찾아온 남태평양의 뉴질랜드는 낙원이 아니었다. 새 천 년에 다시 찾은 교회도 낙원은 아니었다. 낙원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는 듯 하지만, 안개처럼 잡히지 않는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이 잊혀진 곳에 낙원은 없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 잊혀져 갈수록 낙원도 멀어져 간다.

낙원이 그립다. 새 해엔 낙원에 살고 싶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분의 뜨거운 피로 붉게 물들어가는 2014년 마지막 달의 저녁하늘이다. 

채원병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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