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침 묵상(52) - 퍼시픽로즈와 사과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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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원병의 아침 묵상(52) - 퍼시픽로즈와 사과벌레

정원교회 0 2666
퍼시픽로즈라는 사과가 있다. 이름하여 ‘태평양의 장미’다.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핑크레드 칼라의 큼직한 사과다. 육질도 좋고 단 물도 많아 아삭아삭 십는 맛도 일품이다. 한때 무척 즐겼었는데 요즘은 눈에 띄지를 않는다. 

하루는 탐스런 퍼시픽로즈 한 알을 물로 깨끗이 씻었다. 붉은 빛이 더욱 윤기를 발한다. 한 입에 물었다.  사과의 단 맛이 입안에 흥건하게 고인다. 십을수록 사과의 단 맛이 입에 가득하다. 두 입, 세 입을 물어 맛나게 십다 기겁을 하고 뱉어낸다. 베어내고 남은 사과 안에 벌레 한 마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아름답고 맛있는 사과 안에 벌레가 있다니! 벌레 한 마리가 퍼시픽로즈의 품위를 다 버려놓았다. 

목회자를 퍼시픽로즈에 비교해도 괜찮은지 모르겠다. 개나 소나 목사가 된다는 비아냥거림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터라, 자격지심이 발동한다. 감히 목사를 사과의 제왕인 퍼시픽로즈에 비교하다니! 그래도 목사는 퍼시픽로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목사는 일반성도보다는 훨씬 더 많이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을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목사는 퍼시픽로즈라고 할 만 하다. 문제는 그 속에 감추어진 벌레다.

내 안에도 벌레가 살고 있다. 그 벌레가 무엇인지 나는 잘 안다. 그 벌레는 없는 듯 하다가 어느 순간에 문득 꿈틀거리며 내게 말한다. “너는 벌레 먹은 사과야!” 그렇다. 내 안에는 교묘하게 위장된 많은 벌레들이 숨어있다. 나는 벌레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벌레를 감추고 산다. 

복음주의 상담심리학자인 래리 크랩은 ‘네 가장 소중한 것을 버려라’라는 책에서 말한다. “나는 30년 동안이나 수많은 강의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은사를 주셔서 강단 위에서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크게 쓰임 받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나면, ‘당신은 정말 솔직하고 진솔해요. 당신도 갈등하고 있고 모든 것을 갖추지는 못했음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와 같은 말들을 자주 듣습니다. 사람들은 감탄하듯이 이런 말들을 합니다. 그러면 나는 속으로 씁쓸히 웃습니다. 내 속에 있는 벌레를 조금만 보여준다면 그들이 다시는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얼마나 드러낼 지를 선택합니다. 나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세계에서 어떻게 해야 생존할 수 있는 지를 아는 것이죠.”

목회자로 산다는 것은 벌레를 감추며 사는 것인지 모른다. 목회자뿐 아니라, 대부분의 성도들, 나아가서 거의 모든 인간은 자신 안에 있는 벌레를 감추고 산다. 단지 목회자는 그 정도가 더 심할 뿐이다. 자신 안에 숨어있는 벌레를 다 드러낸다면 목회는 끝장이다. 퍼시픽로즈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러나 솔직한 척 어느 정도 드러내면, 레리 크랩의 고백처럼 청중들은 오히려 감탄한다. 보기 드물게 솔직한 목회자라고 칭찬한다. 사실 어느 정도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솔직히 나의 벌레를 드러내 보이는 경우란 별로 없다. 특히 설교에서는 거의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고의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부러 내 안에 있는 벌레들을 다 내보이지는 않는다. 

솔직하지 못한 것일까, 덕이 되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일까? 바리새인들의 벌레와 나의 벌레는 무엇이 다른 것일까?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 솔직해질 수 있는 것일까? 과연 솔직하지 않은 것은 위선인가? 나는 솔직하지 못한 목회자인가, 위선적인 목회자인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내 안에 있는 벌레들을 모두 토해낸다. 기도하며 말씀을 준비하고, 예배를 준비한다. 빨간 사과를 열심히 문지르면 빛이 나듯이, 열심히 기도하고 얼굴에 빛이 조금 난다. 벌레도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진 듯 하다. 그렇다고 벌레가 죽은 것은 아니다. 벌레는 기회만 오면 여전히 꿈틀거리며 살아난다. 빛나는 사과라고 해서 벌레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벌레를 숨기고 산다. 모든 사람이 자신 속에 있는 벌레들을 다 드러낸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옥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경악할 것이다. 상대방에 대해 가졌던 존경심은 물론, 호감도 사라질 것이다. 자신 안에 있는 벌레는 용납할 수 있어도, 남 속에 있는 벌레는 참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싼 똥 냄새는 매일 맡아도, 남이 뀐 방구에는 역겨워하는 게 인간이다. 

그러나 똥 안 누는 사람 없고, 벌레 없는 인간 없다. 문제는 자신의 몸에서 나는 악취에는 무감각해지고, 남에게서 나는 냄새에는 민감해한다는 데 있다. 자신 안에 있는 벌레에는 애써 눈을 감고, 남의 속에 있는 벌레는 기가 막히게 잘 찾아내는 게 인간이다.

똥 안 누고 살 수 없듯이, 이 세상 사는 동안 벌레는 평생 함께 가야 할 인생의 동반자다. 중요한 것은 자신 안에 있는 벌레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럴 때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가 엎드릴 수 있다. 벌레 없는 인간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도 필요 없고, 벌레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도 없다.

오죽하면 사도 바울도 이렇게 고백했으랴?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1, 24)

채원병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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