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청지기로 살아가라.(벧전 4:7-11) - 광림교회 정존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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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청지기로 살아가라.(벧전 4:7-11) - 광림교회 정존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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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벧전 4:7-10)

청지기란 주인의 재산을 맡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한 집안이나 국가의 흥망성쇠는 그것을 맡은 청지기가 누구냐에 달려 있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에게 팔려갔을 때, 보디발은 히브리 노예인 요셉에게 집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청지기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선한 청지기였습니다. 그 결과 보디발의 형통케 되었습니다. 요셉이 나중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바로가 인장반지를 빼서 주었습니다. 이것은 나라 전체를 맡겼다는 뜻입니다. 한 집안의 청지기에서 한 나라의 청지기가 된 것입니다. 그랬더니 애굽 전체가 복을 받아 극심한 기근 속에서도 양식을 나누어주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청지기가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맡기셨습니다. 건강, 자녀, 소유, 생명까지도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잠시 맡겨 주신 것입니다. 왜 맡기셨을까요? 잘 관리하라고 맡겨주신 것입니다. 

주전 3세기 아테네 시내 한복판에서 한 남자가 대낮에 등불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왜 대낮에 등불을 가지고 다니십니까?” 그랬더니 남자가 말합니다. “난 사람을 찾고 있소”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되묻습니다. “사람을 찾다니요?” 남자는 대답합니다. “사람다운 사람을 찾지 못하여 등불을 들고 이렇게 헤매고 있소” 이 사람은 바로 유명한 디오게네스라는 철학자였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오신다면 누굴 찾으실까요? 다름 아닌 청지기를 찾으십니다. 그런데 그냥 청지기가 아니라 선한 청지기를 찾고 계십니다. 

1. 선한 청지기는 깨어 기도함으로 영적인 분별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성경의 달란트 비유에 보면, 주인이 타국에 가면서 종들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이 세 종은 바로 청지기였습니다. 나중에 주인이 돌아왔을 때, 앞의 두 종은 맡긴 것의 두 배로 달란트를 남겼고, 주인으로부터 칭찬과 상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한 종은 말하기를 “나는 주인께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한 달란트를 그냥 감추어 두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앞의 두 종과 뒤의 한 종이 다른 게 무엇일까요? 바로 분별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을 완전히 잘못 알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주인이 뭘 원하는지 도무지 분별할 줄을 몰랐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컨대, 분별할 줄 모르니까 악한 종이 된 것입니다. 선한 청지기가 되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분별하지 못하는 인생은 절대로 선한 청지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말하기를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롬 12: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것입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오늘 7절에서 바울 사도께서 뭐라고 하시나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성경에 요셉 이상으로 훌륭한 청지기는 다니엘입니다. 그는 당시 세계 최 강대국이라 할 수 있는 바벨론 전체를 다스리는 총리에 올랐던 사람입니다. 왕의 신임을 받아 왕이 나라 전체를 맡겼습니다. 다니엘은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요? 인간적인 지혜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는 어떤 지혜자나 술사들도 풀지 못한 느부갓네살의 꿈을 풀어낸 사람입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선한 청지기가 되려면 무엇보다 기도로 영적인 분별력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선한 청지기는 뜨겁게 사랑하고 원망없이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보면 봉사를 하다가 한 순간에 실족하는 경우들이 참 많습니다. 그렇게 되는 가장 큰 이유가 서운함입니다. 이 서운한 마음 드는 것은 평신도만 그런 게 아닙니다. 제가 부목사로 일을 할 때 일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마음속에 커지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그리고 사람에게 보상받고 싶은 마음입니다. 분명히 처음에는 하나님을 보고 시작한 일인데 어느 샌가 사람을 바라보고, 인정을 바라고 보상을 바라더란 말입니다. 

이같이 서운한 마음이 들고 원망이 드는 것에 대해 본문은 뭐라고 하는가?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8-9절)” 무슨 말입니까? 누군가에게 봉사를 할 때 서운해 하거나 원망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봉사를 하든, 어떤 헌신을 하든 서운함과 원망의 올무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서운함과 원망을 이길 수 있을까?  봉사의 동기를 바르게 세워야 합니다.  

먼저는 은혜가 봉사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은혜, 나같 은 자를 살리신 은혜가 봉사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사랑이 봉사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봉사할 때, 누군가를 대접할 때 가장 중요한 게 무언지 아십니까? 사람들이 사랑스러워야 합니다. 교우들이 서로 사랑스러워야 합니다. 

제 사무실에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손님이 하나 있습니다. 교회학교의 한 꼬마입니다. 사무실 문을 노크하고 정중하게 배꼽 인사를 합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그 모습이 하도 사랑스러워서 들어오게 해서 과자를 주었더니 얼마나 행복해 하는지 모릅니다. 자리를 차지하고 다 먹고는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갑니다. 그런데 아이가 올 때마다 서랍 속에 과자가 줄어가서 걱정하던 차에 마트를 갖더니 그 과자를 파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사다 놓았습니다. 제가 아이에게 대접을 하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사랑스러워서....... 교회 안에서 봉사를 하고 누군가를 대접할 때 다른 동기가 아니라 사랑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3.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봉사하라. 
교회 직분에 대한 잘못된 오해 중의 하나는 ‘교회의 직분이 어떤 것은 좋고 나쁘다. 어떤 자리가 높고 어떤 자리가 낮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을 꼬집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장로님이 천국에 갔습니다. 천사가 그를 맞이하며 이 땅에서 수고했으니 대접한다며 식당에 데리고 갔습니다. 이 장로님이 식당에 앉아 있는데 앞 테이블에 낯익은 얼굴이 보입니다. 보니까 같은 교회의 박 집사가 있는데 탕수육을 먹고 있었습니다. 속으로 생각하기를 ‘집사가 탕수육이면 장로는 팔보채나 유산슬 정도는 되겠구나.’ 그런데 자장면이 나온 것입니다. 심통이 나서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집사가 탕수육인데, 어떻게 장로인 제게 자장면을 주십니까? 그때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너희 교회 김목사는 자장면 배달 나갔단다." 

우리가 교회 직분을 맡았을 때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직분은 하나님이 주신 직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이 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맡긴 직분이라고 생각하거나 내가 될 만해서 되었다고 생각하기에 직분을 헌신짝 내 버리듯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교회 직분은 은사대로 주어지는 것이지 높고 낮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도 높고 낮음, 귀하고 천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은사에 맞게, 우리의 재능에 맞게 주신 것입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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