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을 빼앗기지 않는 교회(눅 10:38-42) - 광림교회 정존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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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을 빼앗기지 않는 교회(눅 10:38-42) - 광림교회 정존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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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여행을 할 때 간혹 다른 사람의 집에서 머물 때가 있습니다. 사실, 남의 집에 머문다는 것은 불편하고 부담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떤 집은 마치 내 집처럼 편안한 집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집이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나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자주 방문하시고 편안하게 머무신 한 가정이 있었는데, 베다니에 사는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3남매의 집이었습니다. 특별히 이 가정은, 예수님은 당신의 생애에서 가장 힘든 시간인,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 한 주간을 지내신 가정입니다. 이걸 보면 예수님이 이 가정을 얼마나 좋아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모름지기 교회는 이와 같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좋아하시는 교회, 예수님이 항상 들르시는 교회, 예수님이 편안하게 좌정하시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낯선 도시로 출장을 갔습니다. 때마침 주일인지라 가까운 교회로 예배드리기 위해 호텔 문을 나섰지만 교회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마침 거리에 교통 정리하는 경찰이 있기에 근처에 좋은 교회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사람은 소개받은 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리고 돌아오는데, 그 경찰이 여전히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서는 물었습니다. “아까 소개해 준 교회를 찾아가는 동안 여러 교회를 지나쳤습니다. 왜 가까운 곳을 소개하지 않고 그 멀리 떨어져 있는 교회를 소개했나요?” 그러자 경찰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교회를 다니지 않아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인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 얼굴이 가장 밝고 기쁘고 행복해 보였기 때문에 그 교회가 좋은 교회 같아서 소개해 드렸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좋은 교회는 무엇보다 기쁨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기쁘게 사는 것, 기쁜 얼굴을 하고 살아가는 것, 그게 최고의 전도입니다. 교회는 무엇보다 기쁨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1. 교회는 마르다의 기쁨이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마르다 마리아 두 자매의 집은 비록 부유하고 좋은 집은 아니었지만 이 세상의 어떤 가정도 가질 수 없는 큰 기쁨을 가진 가정이었습니다. 왜 그런가요? 이 가정은 예수님이 오기를 즐겨하셨고, 예수님이 머무시는 가정이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마르다, 마리아 두 자매에게는 예수님을 모시는 기쁨이 있었는데 두 자매가 예수님을 모시는 방식이 좀 달랐습니다. 

그 중 마르다가 예수님을 모셨던 방식은 예수님을 열심히 대접하는 것이었습니다. 38절 보면 예수님을 가장 먼저 영접한 사람이 바로 마르다입니다. 이 마르다는 센스가 있는 여자입니다. 40절에 보면 “마르다가 준비하는 일이 많았다”고 했는데, 마르다가 준비한 일은 바로 ‘예수님을 대접하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고 섬기는 일이 그렇게 좋고 기뻤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르다의 기쁨입니다. 

기쁨 중의 최고의 기쁨은 대접받는 기쁨보다 대접하는 기쁨입니다. 사실, 대접하는 것은 내 것을 주고 내가 손해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대접을 하는 것이 정말 기쁜 때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입니까? 대접하는 대상이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대상일 때 말할 수 없이 기쁩니다. 마르다도 예수님을 대접했을 때 그 자체가 너무너무 기쁜 것입니다.   

교회 안의 많은 봉사와 섬김을 감당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들은 다 마르다입니다. 그렇다면 마르다인 교우들에게는 다름 아닌 이 마르다의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2. 교회는 마리아의 기쁨이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마르다의 기쁨이 예수님을 열심히 대접하고 섬기는 기쁨이었다면, 동생 마리아의 기쁨은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예배하는 기쁨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마리아가 보여준 모습은 당시로서는 굉장히 이례적인 모습입니다. 39절에서 마리아가 취한 행동을 보세요.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유대 사회의 통념으로 볼 때,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사회는 우리나라 유교사회와 비슷해서 집 안에서 남녀가 거하는 장소가 구분이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시는 그 자리는  여자인 마리아가 있을 자리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이 ‘발치에 앉다’라는 말의 원어는 ‘파라카데조마이’인데 이 뜻은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을 받을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주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그 자리를 빼앗기지 않고 지켰습니다. 마리아는 말씀의 감격과 예배의 기쁨을 알았고 그걸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마리아의 모습은 교회가 어떤 기쁨을 가져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어떤 기쁨입니까? 말씀의 기쁨, 예배의 기쁨입니다.  교회에 다른 어떤 기쁨보다 앞서야 하는 기쁨이 바로 말씀의 기쁨, 예배하는 기쁨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리아의 기쁨입니다. 

3. 기쁨을 빼앗기지 않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이 오셨을 때 마르다도 기쁨으로 주님을 대접했고, 마리아도 기쁨으로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마르다와 마리아 사이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언니 마르다가 예수님을 대접하고 싶은 게 많으니까 보통 바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한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데, 동생인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한가하게 앉아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마르다는 마리아에게 여러 가지로 신호를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눈치 없이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결국에는 마르다가 폭발을 한 겁니다. 얼마나 서운하고 화가 났던지 예수님께 와서 원망 섞인 말을 하죠.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마르다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마르다가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자기가 좋아서 대접한 것이라면 끝까지 기쁨으로 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마르다의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동안 목회하면서 교회 안의 수많은 마르다들을 봐왔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보면 참 많은 마르다들이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교우들을 위해서 애를 쓰는데 일이 너무너무 많아요. 그리고 혼자 애를 씁니다. 그러면서 지치고 상처를 받고 쓰러집니다. 왜 교회 안의 마르다들이 마음이 힘들어지고 마음이 상하는가? 먼저는 일이 너무 과중하고 분주하기 때문입니다. 마르다가 폭발한 이유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40절)”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마르다가 마음이 상하는 이유는 사람 때문입니다. 본문의 마르다도 일도 힘들었지만 돕지 않는 마리아 때문에 화가 난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이러한 마르다의 아픔과 상처를 우리 주님이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마르다에게 뭐라고 위로셨나요?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41절)” 아울러 주님이 마르다에게 원하신 것은 일과 사람 때문에 기쁨을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42절에서 주님은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마리아만을 향하신 말씀이 아니라 마르다에게 똑같이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대접하는 거룩한 기쁨을 가졌다면 일과 사람 때문에 그 기쁨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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