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침 묵상(60) - 누구의 것이냐

기독교


 

채원병의 아침 묵상(60) - 누구의 것이냐

정원교회 0 2144
푸르고 높은 하늘, 따가운 햇살, 선선한 바람, 어느 새 가을이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다. 뉴질랜드는 벼농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실감이 잘 나지 않지만, 그래도 가을은 풍성한 결실의 계절이다. 그런데 수확을 거두기 위해서는 먼저 씨를 뿌려야 한다. 우리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 있다. 어떤 씨를 심느냐에 따라 열매가 결정이 된다. 사람은 누구나 다 마음 속에 씨를 가지고 산다. 영혼을 살리는 씨도 있고, 영혼을 파괴하는 씨도 있다.

아담의 후손인 인간은 누구나 마음 안에 온갖 종류의 욕심이라는 ‘나쁜 씨’를 가지고 태어난다. 남들보다 더 많이 갖고 싶은 욕심, 남들을 지배하려는 욕심, 남들보다 더 인정받고 싶은 욕심, 성적 욕망, 심지어는 남들보다 더 거룩하게 보이거나 더 의롭게 보이려는 욕심도 있다. 이처럼 온갖 종류의 욕심이라는 씨앗을 가지고 사는 게 인간이다.

이런 욕심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죄와 사망의 뿌리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15절은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믿는 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 안에 있는 온갖 종류의 욕심과 끊임없이 싸우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 싸움을 싸우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씨앗이다. 믿는 자들 안에는 영혼을 죽이는 욕심의 씨와 영혼을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씨가 함께 뿌려져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완성의 의인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 4절은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않는다”고 안일한 신자들을 향해 질책한다.

욕심과 죄는 이기적인 자기사랑이라는 모습으로 우리의 삶에서 나타난다. 이런 이기적인 자기사랑은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며 신자들이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괴롭힌다. 구원은 결코 가만히 앉아서 열매를 먹는 것이 아니다. 열매를 맺는 영적 싸움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 구원이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으므로, 우리도 부활과 영생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간단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죽음의 첫 씨앗도 되셨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십자가의 죽음이 없이는 부활도 없다. 마찬 가지로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씨가 우리 안에 살아있지 못하다면, 부활의 열매도 맺을 수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죽음의 첫 씨앗이 되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첫 번째라는 말이 갖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히브리어에서 처음 것이란 그 뒤에 따르는 나머지 모든 것을 포함하는 단어다. 기차놀이 할 때 앞서가는 사람을 뒷사람들이 줄줄이 따라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과 함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과 함께 죽는 십자가의 자리에 들어가야 한다.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씨가 있기에, 부활이라는 열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십자가의 자리는 거부하고, 부활이라는 영광의 열매만 바라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과연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씨가 없이 부활이라는 열매가 맺힐 수 있을까?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죽으셨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단순히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서 거듭남이라는 내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예수라는 생명의 씨앗이 우리 안에 뿌려짐으로써 시작이 된다. 예수의 생명이 우리를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파멸시키고 죽이는 욕심이라는 씨앗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예수의 생명이 점점 왕성해지는 것이다. 점점 우리의 첫 열매이신 주님을 닮은 모습으로 자라나가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눅 9:23).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을 흔히 고난을 짊어진다는 말로 이해들 한다. 그러나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를 진다는 뜻이다. 자신을 죽이는 자리가 십자가의 자리다. 십자가는 모든 죄의 뿌리가 되는 자기 욕심을 죽이는 자리다. 그러면 어떻게 자기 욕심을 죽일 수 있나?

해답은 보다 기본적인 데 있다. 욕심에는 소유의 문제가 바닥에 깔려있다. 성경의 첫 구절인 창세기 1장 1절은 하나님이 우주와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선언한다. 즉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 하나님의 것이라는 절대주권의 선언인 것이다. 

그런데 내 자신도 내 것이고, 내가 가진 재능과 재산과 명성과 모든 것이 자기 것이라고 착각하고 사는 사람이 많다. 우리가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주와 만물, 그리고 내 자신과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기 주권을 포기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주권 앞에 무릎 꿇는 것이다. 십자가의 자리란 이러한 기독교의 가장 기본이 되는 중심사상으로 돌아가는 자리다. 

우리 안에는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과 자기를 부인하는 마음이 모두 있다. 예수를 구원의 주로 믿어 그리스도인 된다는 것은, 이기적인 욕심의 마음이 점점 시들어가고, 자기를 부인하는 자가 되어가는 것이다. 자신과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삶 속에서 열매 맺어가는 자가 되어가는 것이다. 

핵심은 소유의 문제다. 누구의 것이냐의 문제다. 나의 것이냐, 하나님의 것이냐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싸움이다. 한번 냉정하게 생각해보시라. 자신이 주로 어디에 속한 삶을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시라.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자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갈 5:24, 바른성경) 
채원병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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