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침 묵상(66) - 부활절에 생각해보는 가룟 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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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원병의 아침 묵상(66) - 부활절에 생각해보는 가룟 유다

정원교회 0 2077
새해가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4월 중순이다. 하루하루가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돌아간 것 같다. 단조롭게 돌아가는 일상의 삶 가운데서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날들이 있다.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돌아가신 분을 기리는 기일 등이 그렇다. 

교회에도 특별히 의미 있는 날들이 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삼대명절을 특별히 의미 있는 날로 기념하여 지켜왔다. 성탄절, 부활절, 성령강림절이다. 세 절기는 모두 인류구원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세계에 찾아오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셨으며, 성령을 보내셨다. 인생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전방위로 인류의 역사에 적극 개입하고 계신 것을 잘 알 수 있다. 

영생은 천지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그러므로 영생의 부활에 참여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다 누려도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그 인생은 한마디로 망한 인생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가진 것 없고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하더라도, 영생의 부활에 들어가는 자들은 모든 것을 얻은 사람들이다. 영생은 영원한 안식과 자유와 영광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저녁, 최후의 만찬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다. 십자가의 때를 불과 몇 시간 앞둔 마지막 날 저녁이었다. 지상에서의 가장 힘든 시간을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며, 끝까지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셨다.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수건으로 닦아주시며, 마지막 사랑을 보여주셨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기 위해서는 제자들 아래 무릎을 꿇고 앉아야 한다. 당시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주인의 발을 씻어주는 것은 대개는 노예들이나 하는 천한 일이었다. 노예 중에서도 유대인 노예들에게는 발 씻는 일을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이방인 노예들이 주인의 발을 씻었다. 그만큼 남의 발 아래 무릎 꿇고 앉아서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천하고 모욕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가장 낮고 비천하고 모욕적인 자리로 스스로 내려가셔서 제자들을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으로 섬기셨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과 섬김이 절정을 이룬 자리가 십자가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며,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은 바로 이런 주님의 마음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다. 십자가의 정신을 배우며,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사는 것이 쉽지 않다.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어렵다. 왜 어려울까?

마귀가 끊임없이 유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마귀의 유혹 앞에 너무나 쉽게 무릎 꿇고, 힘없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는 주님께서 자신의 발을 닦아주시는 순간에도 어떻게 하면 자신의 주인을 팔아 넘길까 생각하고 있었다. 요한복음 13장 2절은 마귀가 유다의 마음에 주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말한다. 

가룟 유다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예수를 판 이유는 욕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룟 유다가 단순히 은 삼십이 탐이 나서 주님을 판 것은 아니었다. 은 삼십은 노동자들 한 달 급료에 해당되는, 얼마 안 되는 돈이다. 가룟 유다가 주님을 배반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주님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었다. 자신의 현실적인 욕심을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예수에 대한 실망이 예수를 배반하게 하였던 것이다. 한 마디로 현실에 대한 욕심이 그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이것이 마귀가 유혹하는 방법이다. 마귀의 유혹은 부활과 영생에 대해 눈을 멀게 하고, 현실에 집착하게 하는 것이다. 가룟 유다는 현실에 집착하여 자신의 욕심을 구하려다, 영생을 놓친 대표적인 사람이다.

미국에서 가장 큰 교회는 ‘긍정의 힘’의저자인 조엘 오스틴 목사가 목회하는 레이크우드교회다. 이 사람은 현실적인 행복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우리 신앙의 최종 목적인 부활과 영생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타적인 섬김이나 사랑에도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놀라운 것은 이런 교회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는 사실이다. 불나방이 따로 없다. 

영생은 보지 못하고, 현실에서만 천국을 찾는 어리석은 자들이 많은 오늘날이다. 교회는 부활과 영생을 공유한 자들이 서로를 섬기며 예수의 정신을 배워나가는 천국공동체여야 한다. 주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도중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다. 천국공동체에 속한 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서로를 섬겨야 하는 지, 본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런데 이타적인 섬김의 정신은 흐릿해져 가고, 이기적인 행복이 널리 퍼져가고 있다. 교회도 교인도 제 맛을 잃어가고 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13절에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부활과 영생을 놓치고 현실에서의 행복만 찾는다면, 그 교회와 그 교인은 맛을 잃은 것이다. 수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맛을 잃고, 마귀의 발 아래 밟히고 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발 아래 무릎 꿇으시고 발을 닦아주셨는데, 마귀의 발 아래 무릎을 꿇고 있지는 않은지, 부활절을 앞두고 생각해본다. 

제 정신이 아닌 사람을 맛이 간 사람이라고 한다. 맛이 간 교회, 맛이 간 교인들이 많다. 예수의 맛, 천국의 맛을 잃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볼 일이다.

채원병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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