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음에 입성하시는 예수님(마 21:1-11) - 광림교회 정존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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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에 입성하시는 예수님(마 21:1-11) - 광림교회 정존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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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캘리포니아 파사데나라는 곳에서는 신년이 되면 로즈 퍼레이드라고 하는 축하 퍼레이드가 벌어집니다. 퍼레이드 규모가 어마어마하고 매우 가볼만 합니다. 갖가지 꽃 장식들과 대형 인형들, 휘황찬란한 데코레이션을 한 마차들이 두 시간 동안 계속 지나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퍼레이드를 보기 위해 전날부터 와서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기도 합니다.  

고대의 국가에서 왕이 전쟁에 나가서 승리하고 성으로 돌아올 때, 그냥 들어오는 게 아닙니다. 그는 군마를 타고, 머리에는 면류관을 쓰고, 나팔이 울리는 가운데 승리의 퍼레이드를 펼치면서 백성들의 환호 속에 성에 입성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장면인데, 이 때 큰 퍼레이드가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이 예루살렘 입성은 예수님의 생애 중 가장 중요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한 주간의 첫 번째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들어가실 때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셨어요. 그 때 사람들은 겉옷을 예수님의 가시는 길에 깔아 드렸고, 또 어떤 이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며 예수님을 환호했으며, 아이들은 따라오면서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예수님의 입성은 순식간에 대 퍼레이드가 되었습니다. 종려 주일을 맞아 ‘우리 마음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이란 제목으로 몇 가지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1. 예수님의 입성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신 입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삶이셨습니다. 구약의 가장 중요한 약속은 “메시아에 대한 약속”입니다. 구약에, 메시아의 출생과 생애와 죽음에 대해서 약속하신 말씀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놀랍게도 그 많은 메시아의 약속들이 예수님에게서 다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다 이루셨습니다. 본문도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이루어지는 광경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어떻게 얻었는가 보세요. 베다니란 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건너 마을로 가라”고 하셨고,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그 주인이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속으로 ‘과연 나귀가 있을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갔더니 예수님이 하신 말씀 그대로였습니다. 말씀하신대로 나귀 새끼가 매여 있고, 풀어 끌고 오려니까 주인이 묻습니다. 주님이 알려주신 대로 대답했더니 주인이 아무 말도 없이 보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하필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4절에 나옵니다.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여기에 “이는”이란 무엇입니까? 나귀를 빌려오는 과정에서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도대체 이런 일이 왜 있었는가? 바로 선지자를 통해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 약속은 5절에 나오는데 ‘메시아가 나귀 새끼를 타고 임하신다’는 약속인데, 이 약속은 예수님이 오시기 500년 전에 스가랴 선지자에 의해서 예언된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500년 전에 주신 약속의 말씀을 오늘 본문에서 그대로 성취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한번 말씀하신 바는 반드시 이루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레미야 33:2에서는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행하시고 지어 성취하시는 여호와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의 입성은 죽음의 길을 승리의 퍼레이드로 바꾸신 입성
본문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입성한 때는 유대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이었습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은 전국 각지와 세계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려고 몰려와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 유월절에 3백만 명이 몰렸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유월절을 지키는 것은 유대인들의 평생의 소원이요 기쁨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기쁨이 넘치는 예루살렘 성이 오늘 본문의 예수님께는 더 이상 가고 싶은 성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예루살렘만 생각하면 인간적으로,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께 있어서, 예루살렘은 희생과 죽음이 기다리는 성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들어가신 후에 체포를 당하고, 심문과 재판을 받으신 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은 예수님께 바로 죽음의 성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성을 들어가실 때의 모습을 보세요. 놀랍게도 왕의 모습입니다. 비록 나귀 새끼를 탔지만 모습이 그렇게 당당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얼굴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운 기색이나 그림자가 없습니다. 지금 들어가는 성에 십자가가 기다리는데, 십자가를 향해서 당당히 나귀를 타고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 앞에도 예루살렘이 가로막고 버티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세상은 마치 예수님을 위협하고 십자가에 죽인 예루살렘처럼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갖가지 위협을 주고 실족케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처럼 당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해 두려움 없이 나아가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 세상을 향해 걸어가야 합니다. 
3. 예수님의 입성은 겸손한 왕의 입성입니다. 
세상의 왕들의 일반적인 모습은 무엇입니까? 군림하고 거만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참된 권위는 교만함이나 군림함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0세기의 성자라고 불린 슈바이처 박사가 고향을 방문했을 때, 기차역에 많은 지인들이 나와 있었습니다. 열차가 도착했을 때 그들은 박사가 1등, 2등간에서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맨 뒷간 3등 열차에서 걸어서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박사에게 왜 3등간에 타고 오셨느냐고 묻자 슈바이처 박사는 대답하기를 "4등간이 있어야지요." 이 말을 한 슈바이처가 무시를 당했겠습니까? 아니요. 말할 수 없는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참된 권위와 존경은 교만이나 군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겸손에서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나귀새끼를 타신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어른이 나귀새끼를 탔으니 발이 질질 끌려 땅에 닿을 정도이고 어기적어기적 들어가는 모습이 얼마나 초라한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왜 이렇게 초라하게 들어가셨을까요? 스가랴 선지자는 이 장면에 대해서 말하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가장 존귀한 자였지만 가장 겸손한 자리로 내려가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저 베들레헴의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가나한 목수의 아들로 자라셨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겸손하게 입성하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기를 완전히 낮추시고 비우셨습니다. 그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빌 2:8-9에 보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에 겸손한 왕으로 오십니다. 우리 역시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맞이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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