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침 묵상 (70)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기독교


 

채원병의 아침 묵상 (70)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정원교회 0 3160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으리라” 주님께서 가룟 유다에 대해 하신 말씀이다. 주님을 배반하고 팔아 넘긴 가룟 유다를 재해석한 영화가 있다. 안드레이 보가티레프 감독의 러시아 영화 '유다'인데, 2013년 10월 8일자 뉴스앤조이에 실린 내용을 소개한다.

“좀도둑질하는 부랑자 유다가 우연히 예수의 설교를 듣고, 예수와 제자들의 돈을 훔치다가 들킵니다. 예수는 그를 용서합니다. 유다는 예수의 용서가 이해되지 않아, 오히려 그를 따르기로 합니다. 이런 유다에게 예수는 돈 자루까지 맡깁니다. 유다는 메시아가 돌에 맞고 핍박받는 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신들은 어디로 가느냐"는 질문에 "스승만이 길을 아신다"며 묵묵히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을 맹목적이라고 비판합니다.

 의심과 논쟁 끝에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주는 것만이 예수가 메시아임을 증명하고,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다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이 영화에 의하면 가룟 유다는 예수의 메시아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신에 부여된 사명을 다한 것이다. 가룟 유다는 열두 제자 중 주님의 십자가 사역을 이해한 유일한 제자가 되고, 주님의 메시아 사역이 가능하도록 악역을 자처한 가장 헌신적인 제자로 묘사된다.

유다에 대한 동정론이 심심치 않게 거론되고 있다. 그 중에는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오해도 크게 한 몫 하고 있다. 가룟 유다는 구원받았다고 집요하게 주장하는 교인으로 인해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를 어느 목사님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악역을 맡았고, 그 결과 십자가의 사역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영화 ‘유다’에 예정의 개념이 추가된 형국이다.

결과론적으로 말하면,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인류에게 구원의 문이 열렸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사역을 위해서 가룟 유다를 예비하시고, 배반 하도록 예정해 놓으셨다. 인류구원이라는 보다 큰 선을 이루시기 위해서, 유다를 희생양으로 삼으신 것이다. 예정을 잘못 이해하면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다.

유다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나중에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지고 창자가 다 흘러나왔다. 유다의 비참한 죽음은 유다에 대한 동정론을 일축한다.

그런데 유다의 배반행위를 하나님께서 ‘미리’ 작정해놓으신 예정의 결과로 이해한다면, 가룟 유다는 인류 역사상 가장 억울하고 비참한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도 가장 악한 역할을 담당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며, 저 세상에서도 구원받지 못한 인간이다.

하나님께서 ‘미리’ 짜 놓으신 각본에 의해서,,,유다의 행동이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놓으신 계획의 결과로 이루어졌다고 이해할 때 문제는 심각해진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미리’ 정해 놓으신 일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공의를 신뢰할 수 있는가? 인간들의 운명은 ‘미리’ 정해져 있으며, 각자 ‘미리’ 정해진 운명대로 누구는 죄에서 구원받고, 누구는 죄로 인해 버림받는다면,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공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가룟 유다는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책임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예정을 ‘미리’ 결정된 운명론으로 잘못 이해하면, 신앙이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의외로 많은 교인들이 예정을 운명론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예정은 인간의 운명이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운명론이 아니다.

에베소서 1장 4절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들을 택하셨다고 되어 있다. 마치 구원받고 못 받고의 개인의 운명을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미리’ 결정해 놓으신 것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의 배신도 ‘미리’ 결정해 놓으신 것이 된다.

‘창세 전’이란 어떤 상태인가? 우주가 존재하기 전, 즉 시간과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기 전이다. 시간이 없는 상태에서는 ‘미리’ 알고, ‘미리’ 정한다는 ‘미리’의 개념도 없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영원한 현재일 뿐이다. 일반교인들에게는 좀 어려운 내용이지만, 하나님의 예정은 시간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예정은 하나님의 영원하심 안에서 창조세계를 다스리시고, 우리 인간들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섭리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정은 시공간이라는 삼차원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입장에서 쉽게 말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운명을 ‘미리’ 프로그래밍해놓으셨고, 각 사람은 ‘미리’ 정해진 운명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삼 년 동안 따라다니며, 수많은 기적을 직접 보고, 가르침도 받았지만,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는 못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미리’ 결정해놓으신 결과가 아니다. 주님께서는 유다에게 수없이 많은 기회를 주셨지만, 유다는 끝까지 믿기를 거부한 것이다. 스스로 구원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지, 주님께서 버리신 것이 아니다. 여기에 구원에 있어서의 인간의 책임이 있다.

하나님의 예정을 운명론으로 잘못 이해할 때, 인간의 책임은 사라지고, 모든 책임은 하나님께로 돌려진다. 그 결과 무책임하고 무기력한 신앙인을 양산해내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삶 가운데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도우심을 믿으며, 주어진 삶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개척해나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

채원병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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