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침 묵상 (76)-예수님의 작은 꽃

기독교


 

채원병의 아침 묵상 (76)-예수님의 작은 꽃

정원교회 0 2341


 금세기에 몸소 사랑을 실천한 삶을 산 사람들 가운데 테레사 수녀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수녀는 자신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작은 몽당연필’이라고 고백했다.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작은 도구라는 뜻이리라. 수녀는 연약한 여자였지만, 온 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자 한 강한 여자였다.

수녀는 1910년 유고슬라비아의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18살에 수녀가 되었고, 3년 뒤에는 테레사로 개명하였다. ‘예수님의 작은 꽃’으로 알려진 성 테레사의 이름을 딴 것이다.

사랑 없는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를 쓰는 몽당연필이요, 삭막한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는 예수님의 작은 꽃,,,, 테레사 수녀가 원했던 삶이다.

수녀는 그 후 인도 캘커타에서 사랑의 선교회를 설립하여, 빈민구제사업에 뛰어들었고, 이어서 ‘죽어가는 자들을 위한 집’도 열었다. 이후 수녀는 1997년 9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과 고아들과 죽어가는 자들을 위해 헌신된 삶을 살았다. 수녀는 197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을 때, 가난한 자들, 장애인들과 병자들, 사랑 받지 못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의 이름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다고 말했다.

사랑의 선교회는 계속 사역을 확장하여 그녀가 사망할 무렵에는 세계 123개 국가에 610개의 선교 단체를 거느리게 되었다.

‘테레사 수녀: 나의 빛이 되어라’라는 책이 있다. 수녀가 고해신부들에게 보낸 40여 통의 편지를 출간한 책이다. 수녀는 캘커타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1948년부터 1997년 사망할 때까지 줄곧 극심한 영적 고통을 체험하며 괴로워했다. 수녀는 편지에서 “캘커타 봉사활동을 시작한 이래로 신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수녀는 자신이 겪은 내적 고통을 지옥에 비교하기도 했고, 한때는 천국과 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까지 드러내기도 했다.

 "나의 신앙이 어디 있는가? 깊은 저 아래라도...아무 것도 없고 오직 공허와 어둠 뿐... 혹시라도 하느님이 계신다면, 제발 나를 용서해 주시길. 나의 생각들을 하늘로 들어 올리기라도 할 때면, 그런 단죄된 공허가 있어, 바로 그 생각들이 날카로운 칼들처럼 되돌아와 나의 영혼을 찌른다... 얼마나 아픈가, 이 미지의 고통! 나는 신앙도 없고, 버림받은 느낌이다. 텅 비어 있고, 신앙도, 사랑도, 열심도 없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일하는가? 만약 하느님이 없다면, 영혼도 있을 수 없다. 영혼이 없다면, 예수-당신도 역시 진리는 아니다."

수녀는 겉으로는 웃으며, 사랑을 온 몸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았지만, 그 영혼은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깊은 어둠의 깊은 감옥에 갇혀있었다. 이 책을 편집한 콜로디에추크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수녀는 기독교인들이라면 누구나 겪는 ‘신앙 속의 어두움’을 평생 껴안고 살면서도, 믿음으로 충만한 궁극적 인내(perseverance)를 이루어냈다”

신앙인에게도 영혼의 어둔 밤이 있고, 마음의 고통이 있다. 욥이 대표적인 사람이다. 욥도 자신은 참으로 의롭게 살았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지 알고 싶어하는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하나님께서 나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보시고, 그가 나의 온전함을 아시기를 바라노라”(욥 31:6) 하나님께서 혹시 자신을 잊고 계신 것은 아닌가, 혹시 자신이 온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테레사 수녀가 겪은 영혼의 어둔 밤과 고통의 문제는 이렇다 저렇다 가볍게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어쩌면 욥처럼 ‘하나님의 부재’ 속에서 겪은 더 강한 ‘하나님의 임재’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의학 전문지 <랜싯>의 편집장을 지낸 폭스 박사는 1994년 캘커타에 위치한 '죽어가는 자들을 위한 집'을 방문한 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시설이 터무니 없이 열악했기 때문이다. 간단한 구호물자나 비상약도 볼 수 없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르핀조차 없이 고통 속에 죽어가고 있었다. 세계 각처에서 보내오는 엄청난 후원금이 있었음에도, 간단한 구호물품조차 없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천문학적 규모의 후원금들이 어디에 쓰여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많은 사람들은 사랑의 선교회 확장과 운영비로 쓰여졌을 것으로 추측한다.

 123개국에 610개의 선교단체를 세웠으니, 비용도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선교인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선교단체의 확장을 위해서 고통 당하는 환자들을 위한 기본적인 진통제조차 갖추지 않았다는 점은 생각해볼 일이다.

수녀는 말기암으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던 한 사람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당신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처럼 고통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입 맞추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그러자 환자가 말했다. “수녀님, 제발 예수님께 부탁 좀 해주세요. 이제 저를 그만 좀 사랑해달라고 부탁해주세요”

이 대화에서 테레사 수녀가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들에게 진통제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겪게 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는 사랑이 이런 사랑일까? 예수님께서는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구해주셨다. 앉은뱅이, 중풍병자, 앞 못 보는 자, 나병환자들을 치료해주셨다. 구원은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다.

수녀는 사랑을 하되, 자신이 정해놓은 방법으로 사랑을 했던 것은 아닐까? ‘죽어가는 자들의 집’에는 죽어가는 자들이 토해내는 고통의 신음소리가 가득했다. 오늘날 교회들도 ‘죽어가는 자들을 위한 집’과 다를 바 없다. 교회는 고통소리에 민감해야 한다.

성도들의 신음소리와 세상의 앓는 소리에 민감해야 한다. 참 사랑은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다. 교회는 아픈 영혼들과 세상을 품는 어머니여야 한다. 그곳에 예수님의 작은 꽃은 피어난다.

채원병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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