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탄식이 변하여 내일의 찬송이 되게 하라(롬 8장 18-30절)-광림교회 정존수 목사

기독교


 

오늘의 탄식이 변하여 내일의 찬송이 되게 하라(롬 8장 18-30절)-광림교회 정존수 목사


한 수도자가 가진 것 없이 숲속에서 홀로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와서 귀한 책 한 권을 선물했습니다. 수도자는 책을 받고 기쁜 마음에 날마다 책을 읽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쥐가 그 책을 쏠아버렸습니다. 수도자는 쥐를 쫓기 위해서 고양이를 길렀습니다. 그런데 고양이를 키우려니 우유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젖소를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수도자가 도 닦으랴, 짐승 돌보랴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짐승을 돌봐 줄 여자를 구했습니다. 몇 해가 지난 후, 이 수도자는 어느덧 커다란 집, 두 아이, 고양이 떼, 젖소 떼, 그리고 아주 잡다한 것들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니, 지금은 딸린 식구들과 소유들을 돌보느라 끝없는 걱정과 염려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내 삶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가?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생각해 보니 책 한권 소중히 간직하려다가 벌어진 일임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수도자는 다름 아닌 현대인들의 모습입니다. 현대인들은 행복을 얻기 위해 숨 돌릴 겨를 없이 달려가다가 문득 삶에 대한 회의로 탄식이 흘러나옵니다. 탄식은 어떤 것에 대한 걱정이나 원망 등으로 한탄하여 숨을 내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탄식을 싫어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탄식에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탄식의 긍정적인 측면과 성경적 유익을 살피고자 합니다.

탄식의 유익

1) 탄식은 가식 없는 영혼의 언어입니다.

탄식이란 것은 가장 정직한 언어입니다. 탄식은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나오는 미사여구가 아닙니다. 그냥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탄식 안에는 어떤 거짓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탄식은 영혼의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탄식은 인생을 철 들게 하고 영혼을 눈 뜨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어릴 때 부모님 속을 꽤나 썩이고 천방지축으로 살던 사람들이 고백합니다. 자신이 정신 차리게 된 계기는 어머니의 깊은 한숨이었습니다. 수 백 마디의 “공부 열심히 해라”는 말보다, 깊은 탄식이 나를 깨우는 강력한 언어였습니다.

3) 무엇보다 이 탄식의 유익은 이 탄식에 하나님이 귀를 기울이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아름다운 미사여구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세리의 기도는 탄식에 가까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는 세리의 기도가 귀하게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내가 죄인입니다” 마음의 깊은 탄식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인격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미사여구가 아니어도, 청산유수가 아니어도 때로는 말이 나오지 않아도, 그 탄식을 들으십니다. 세 가지 탄식의 종류를 생각해 봄으로 은혜 나누기 원합니다.

 

1. 피조물의 탄식

자연을 볼 때마다 그 아름다움은 말로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니까 자연을 대할 때 우리가 들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피조세계의 탄식입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8:22) 이 아름다운 자연세계는, 자세히 보면 몸살을 앓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지난 6월 5일은 환경의 날입니다. 통계자료를 보니, 놀랍게도 1900년 이후 100년간 인류가 저지른 환경 파괴와 오염이 1900년 이전에 진행된 환경파괴 보다 더 크다고 합니다. 지난 100년간 자연이 급속도로 파괴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환경파괴와 오염으로 인한 고통을 엉뚱하게도 인간이 아니라 자연 세계가 받고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환경이 망가졌는데, 대가는 자연이 받고 있는 것입니다. 피조 세계의 탄식이 우리 곳곳에서 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하기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8:22)”고 했습니다. 자연 세계의 파괴로 인한 피조물의 탄식이 들립니다.

그런데 피조세계가 탄식하는 것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롬8:19)” 피조물이 고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인 인간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자연 세계가 신음하고 탄식하는 이유가 인간의 구원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보기 위하여 자연이 신음하고 피조세계가 탄식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니라(롬8:20)” 피조세계가 우리의 구원을 바라며, 탄식하고 고통 받는 것은 그들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해가 안 됩니다. 하나님은 왜 자연만물이 신음하며 탄식하며 고통하게 하셨습니까? 이것은 자연세계가 귀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그만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2. 성도의 탄식

“그 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롬8:23)” 여기서 우리는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을 가리켜 성령의 처음 열매를 받은 자라고 합니다. 즉, 성도는 성령의 처음 열매를 받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처음 열매”는 무엇입니까?

성령의 처음열매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를 알고, 예수를 믿고, 예수를 통해 구원을 경험하고 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축복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라면, 이 성령의 처음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성도의 탄식은 무엇입니까? 성령의 처음 열매가 있고, 구원의 기쁨과 감격이 크다고 해서 우리 삶이 낙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을 받았어도 걱정이 찾아옵니다. 예수를 믿어도 문제가 잘 풀리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을 보니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한다(롬8:23)”고 합니다. 성령의 처음 열매가 있는 것처럼 성령의 나중 열매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세상에서 맛보지 못한 첫 열매를 맛보았지만 신앙은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성령의 처음 열매에 비할 바 되지 않는 놀라운 열매가 후에 있습니다. 현재의 고난보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더 큰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3. 성령의 탄식

마지막 탄식은 성령의 탄식입니다. 우리가 하는 기도가 참 불완전합니다. 내가 잘못 구할 때도 있고, 또한, 마땅히 구해야 하는 기도의 제목인데 놓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불완전할 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성령의 탄식입니다.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우리는 불완전할 때, 성령님은 도우실 수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이 그 탄식을 들어야 할 때입니다. 어느 때보다도 깨어서 근신하여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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