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침 묵상 (81 )- 유병언의 죽음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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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원병의 아침 묵상 (81 )- 유병언의 죽음을 보며

정원교회 0 2751


세월호 사건으로 지명수배를 받아오던 유병언씨가 백골이 다 드러난 시체로 발견이 되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DNA 검사와 지문, 치아 등의 검사결과를 토대로 유병언씨의 시신이 확실하다고 발표했다. 단 타살인지 자살인지 또는 사고사나 병사인지,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발표내용을 보면 조작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 발표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한 마디로 불신의 시대다. 정부 발표가 거짓인 경우가 어디 한두 번이었나? 늘 속으며 살다 보니 이젠 사실도 사실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다. 특히 여러 정황이 의혹투성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유병언씨는 구원파의 삼대 교파 중 한 교파의 교주였다. 구원파 교인수가 약 20만 명이라고 하니, 줄잡아 7만여 명의 신도가 교주로 섬기던 사람이었다. 유병언씨는 성경말씀을 줄줄 외우고, 말솜씨가 뛰어나고, 설교도 아주 잘 했다고 한다. 소위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이었다. 아무나 이단 교주가 될 수 있나? 뭔가 남다른 점이 있으니까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기는 거다. 그는 사업수단도 아주 좋아 속된 말로 돈도 많이 벌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보험에 들 줄 아는 영리함도 있었다. 여권 야권 할 것 없이 수많은 정치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위 유병언의 아이들로 알려진 정치권 인사 중에는 정치실세들도 적잖이 포진해 있다고 한다. 유병언의 죽음으로 가장 좋아할 사람들이다. 사망원인은 알 수 없다. 누군가 돈을 노려 살해한 것인지, 어떤 정치음모가 배후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자연사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 그 혜택을 입은 자들은 많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구린내 나는 모습이 더러운 죽음과 함께 묻히게 되기를 바라는 자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유병언씨의 죽음과 관련된 수많은 미스터리들도 어쩌면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찝찝한 생각이 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세월호 사건이 마치 유병언씨 개인의 문제인 것처럼 온통 관심이 유병언씨에게 쏠리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세월호의 침몰은 안전불감증의 문제고, 나가서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다. 기본원칙과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 중시하는 성과주의의 산물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가지고 있는 전체 구조의 문제다. 이번 세월호 사고를 계기로 국가가 안고 있는 문제해결에 대한 대대적이고 근본적인 손질이 있어야 하는데, 문제의 본질을 망각하고 한 개인에게로 국민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이게 더 문제다.

유병언씨가 입고 있던 옷과 모자는 명품 브랜드였다고 한다. 겉은 명품으로 치장되어 있었지만, 속은 구더기가 우글거리고 있었고, 몸은 썩어 뭉그러져 있었다. 세월호도 겉 모습은 화려했지만, 인간의 욕심으로 그 배는 이미 썩어있었다. 대한민국이라는 배도 이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경제성장이라는 화려한 과실에 눈이 멀어 속은 이미 썩어 들어가고 있다.

이런 현상들이 어찌 비단 유병언씨만의 문제고, 세월호의 문제고, 대한민국의 문제만이겠는가,,, 오늘날 교회나 기독교인들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겉은 예수의 이름으로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있지만, 그 안에 예수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예수의 이름은 있어도, 예수의 이름이 교회나 성도들의 삶 속에 살아있어 보이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셨다(눅 18:8b).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참 믿음의 사람 보기가 힘들어진다. 겉으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치장을 해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예수가 없다.

우리는 모두 아침에 거울 앞에 선다.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세수도 하고 면도도 한다. 화장도 하고 머리도 빗고, 자신의 모습을 단정하게 가꾼다. 자신의 겉 모습은 매일 거울에 비추어 보고 꾸미면서도, 자신의 속 사람을 날마다 비추어 보고 가꾸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말씀 앞에, 예수의 이름 앞에 자신의 속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눈에 보이는 결과를 중시하고, 눈에 보이는 성과를 구하기에 급급하다. 예수의 이름 앞에서 벌거벗은 자신의 모습을 먼저 보아야겠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할 수밖에 없다.

“제가 주님의 이름과 상관없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구하셨는데, 저는 제 뜻대로 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저는 그런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 욕심대로 살고 있습니다. 이웃을 돌보지 못하고 제 욕심만 챙기는 제 자신을 회개합니다. 또한 제가 남을 쉽게 판단하고 쉽게 비판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너무 쉽게 남을 판단하고 비판합니다. 저의 경솔함을 회개합니다. 제가 주님의 마음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제게 주의 마음을 주소서.”

예수의 이름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면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부끄러운 사람인지를 절실히 느끼게 된다. 내 안에 우글거리는 구더기 떼가 보인다. 썩어 뭉그러지고 악취가 진동하는 내 모습이 보이게 된다.

이름은 그 사람을 나타낸다.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의 실제 성품과 삶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가 없다. 예수의 이름을 믿는 사람은 예수의 모습이 자신의 성품과 삶 가운데서 배어나야 한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9)

채원병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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