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침 묵상(94) - 주의 사랑 안에 산다는 것

기독교


 

채원병의 아침 묵상(94) - 주의 사랑 안에 산다는 것

정원교회 0 5949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신자 없고, 그 사랑 안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는 신자도 없다. 그러나 그 사랑 안에서 사는 사람은 드물다. 뭔 소리인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지 않는 신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 9절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나,,,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나의 사랑 안에서 살아라! 성부께서 성자를 사랑하신 것 같이, 주님도 우리를 사랑하시니 그 사랑 안에서 행복하게 살라는 뜻으로 들린다. 그런데 이 말씀이 그렇게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 주의 사랑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저 주의 사랑을 마음껏 누리며 사는 정도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주의 말씀은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주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마는, 주의 사랑 안에서 산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인 차원이거나, 감정의 수준을 뛰어넘는 것이다. 보다 깊고, 성숙한 신앙의 삶에 관한 내용이다.

주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 신자들을 사랑하신다고 하셨다. 성부께서 성자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모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지각을 동원해서도 그 깊이와 넓이와 크기를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성부와 성자 사이의 그 사랑, 하나님 사이의 그 사랑을 우리 인간이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것은 신의 영역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성부께서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 우리가 도저히 추측조차 할 수 없는 그 크신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내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신 성부의 사랑을 우리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그토록 사랑하시는 그분을 우리 죄인들을 위해 내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그렇다면 성부의 성자에 대한 사랑은 결국 누구에게 임하고 있는 사랑인가,,,

성부의 성자에 대한 사랑은 죄인 된 자들 안에서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역설은 주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는 장면에서 극적으로 표현된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태복음 3장 17절)

이제 주께서 십자가를 향한 지상사역을 시작하시는 순간이었다. 자식을 고난과 죽음의 자리에 내주시면서 기뻐할 부모가 어디 있는가,,, 그러나 성부께서는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를 향해서 이제 수난의 길을 떠나는 아들을 보시면서,,, 너는 과연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아들을 보시며 사랑과 기쁨을 말씀하시는 성부,,, 바로 우리 아버지시다. 우리 죄인들을 향하신 아버지 사랑의 역설이요 기쁨이시다.

주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살펴보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11) 너희도 나처럼 순종해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킨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켜라. 그러면,,, 너희가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주의 사랑 안에 머물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주의 사랑 안에 살고 있다고 착각하지 말자! 주의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모든 죄인들을 품으시고, 십자가의 자리로 나가신 우리의 주님이시다. 그 주님을 보시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다. 이제 주께서는 우리에게 “너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시길 원하신다. 그것은 우리가 기꺼이 주의 그 사랑의 자리로 나갈 때 가능할 것이다. 이것이 주의 사랑 안에 사는 성도의 모습이다. 누가,,, 감히 “나는 주의 사랑 안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랑이란 단순히 주관적인 감정적 차원의 것이 아니다. 사랑은 적극적인 행동을 요구한다. 주의 그 크신 사랑은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에게 임하고 있지만, 문제는 그 사랑을 정말 제대로 가슴 깊이 새기고, 그 사랑 안에서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룬 그 사랑의 열매가 우리의 삶 속에서 열리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자리, 십자가의 그 자리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부르신다. 그 부르심은 우리를 십자가라는 무거운 짐을 지라는 부르심이 아니다. 그 부르심은,, 아버지의 사랑,, 주님의 사랑으로의 부르심이다. 진정 너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가슴 깊이 새기라는 부르심이요, 우리를 향하신 주의 사랑을 늘 명심하고 살라는 부르심이다.

사랑은 품기 힘든 사람을 오래 참음으로 받아내는 훈련이다. 그래서 ‘사랑의 장’으로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 4절은 “사랑은 오래 참고,,,”로 시작한다. 주께서는 죄로 상하고 썩어 악취가 진동하는 우리 죄인들을 오래 참으시고 받아주셨다. 만약 주님께서 오래 참아내지 않으신다면, 토해냄을 당하지 않을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너희를 오래 참아낸 것처럼, 너희도 서로를 오래 참아내고, 인내로 서로를 받아내라는 명령인 것이다.

사랑이 이렇게 힘든 것이구나 하는 것을 배워가면서, 우리도 주의 사랑 안에 녹아 들어가, 그 사랑 안에 살게 되는 것이다.
채원병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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