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를 회복하는 인생의 축복 (도둑맞은 감사를 회복하라.)(눅 17장 11-19절) - 광림교회 정존수 목사

기독교


 

감사를 회복하는 인생의 축복 (도둑맞은 감사를 회복하라.)(눅 17장 11-19절) - 광림교회 정존수 목사

뉴질랜드 여름은 날씨가 환상적입니다. 강렬한 태양빛에 온 세계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고 바람이 얼마나 시원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날씨가 도움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자동차를 세차할 때입니다. 자동차를 세차하기 위해서 자동차에 물을 뿌리고 나서 스펀지나 솔로 닦다 보면 어느 샌가 물기가 말라 있습니다. 불과 2-3분 전에 뿌렸는데도 물기가 없고 뽀송뽀송합니다. 그래서 수시로 물을 뿌려야 합니다. 물기가 얼마나 빨리 마르는지 세차하는 동안에 물을 뿌렸던 것을 기억합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에서 가장 빨리 말라버리는 것이 무엇일까?’ 묵상해보니 ‘감사’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우리 삶에서 감사라는 물기가 얼마나 빨리 마르는지 모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삶은 감사할 일 천지입니다. 지난 삶을 돌아보면, 우리 모두의 삶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대한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도록 신기한 것은 그렇게 가슴 벅찬 감사가 밀려왔는데도 며칠만 지나면, 감사의 물기가 말라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역시 우리 삶에 얼마나 빨리 감사가 마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의 주인공들은 예수님 당시에 살았던 나병환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을 만나 그들을 고쳐주십니다. 저는 본문에 나오는 감사를 주제로 세 가지 질문을 나누려 합니다.

1. 우리 마음과 신앙에서 가장 도둑맞기 쉬운 게 무엇인가?
11-14절에는 기가 막힌 믿음의 스토리가 나옵니다. 길에서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들은 나병을 고침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렸지만 예수님께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멀리 서 있습니다. 이것은 나병환자들이 일반들에게 가까이 오면 안 되는 규정 때문입니다. 당시에 나병 환자들은 사람들을 만나면 큰소리로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감추면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만났지만 가까이 가지 못하고 소리를 높여 부르는 것입니다.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눅17:13)” 이들은 비록 몸은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지만, 마음과 열심만큼은 예수님 앞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열정에 예수님은 응답하십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눅17:14)” 예수님께서 “너희 몸을 제사장들에게 가서 보여주라”는 것은 “너희 몸이 이미 다 나은 줄로 믿고 가서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이건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나병 환자들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 말씀대로 가다가 깨끗함을 받게 됩니다. 깨끗함을 받고 간 게 아니라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보세요. 이들은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모든 것을 다 갖춘 이들입니다. 그들은 믿음이 있었고 열정도 있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신뢰도 있었고 순종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빠진 게 한 가지 있었습니다. 바로 감사가 없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눅17:15-16)” 고침을 받은 사람은 열 명인데 돌아와 감사한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돌아오지 않은 아홉 명도 아마 감사를 알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병이 낫기 까지 완전히 예수님을 향해 있었던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모했고, 예수님을 바라보았고, 예수님을 신뢰했고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감사를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감사를 도둑맞았습니다. 바로 본문은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얼마나 감사를 도둑맞기 쉬운 지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2. 가장 불행한 인생은 어떤 인생인가?
본문에 나오는 열 명의 사람은 처음에 똑같았습니다. 똑같이 나병 환자였고, 똑같이 예수님께 와서 간청했고, 예수님께서 가라 하실 때 똑같이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음을 입은 후에 갈립니다. 아홉은 각자 제 길로 갔고 돌아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다시 예수님께 돌아와 영광을 돌리고 감사했습니다.

이 두 부류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에이 뭐 그럴 수 있지” “너라도 와서 다행이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눅17:17-18)” 예수님의 반응은 돌아온 한 사람에 대한 감탄이 아니라 돌아오지 않은 아홉에 대한 한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열 명이 다 돌아와서 감사와 영광을 돌릴 것을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예수님은 오늘도 감사가 없는 신앙에 대해서 안타까워하십니다. 쉬운 말로 말하면, 감사가 없는 신앙은 위태로운 신앙인 것입니다.

3. 무엇이 우리의 신앙을 완성하는가?
본문에서 예수님은 돌아온 한 사람에게 복을 선포하십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눅17:18-19)” 예수님은 고침 받고 돌아오지 않은 자들에게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한 사람에게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감사야 말로 신앙의 완성이고, 구원의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손양원 목사님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손양원 목사님이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절하여 투옥된 중에 사모님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병고 중에서 얼마나 신음합니까? 이 같은 염천에 고열도 심한데, 게다가 병고까지 있으니 설상가상입니다. 그러나 신애와 진리는 기후와 환경을 초월하니, 안심하시오. 꽃피고 '새우는 양춘 가절에만 신애가 있을 뿐 아니라 백설이 분분한 엄동 혹한 중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하며, 오곡백과가 성숙하는 가을에만 하나님이 있을 뿐 아니라, 땀으로 목욕을 하는 이 같은 염천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하며, 금전옥루에서 산해진미를 먹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찬미할 뿐 아니라, 수간두옥 속에 기한질고 중에서도 신의 사랑을 찬양할지니, 항상 기뻐하시고, 범사에 감사하소서. 당신의 신앙이 능히 병고를 극복할 것을 믿고, 나는 안심합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손양원 목사님의 마르지 않는 감사를 보며 신앙의 큰 도전을 받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투옥되었고, 모든 환경이 어려웠습니다. 배고픔, 무더위와 혹독한 추위, 질병과 고열 등 어려움이 따랐지만, 목사님 마음에는 마르지 않는 감사가 있었습니다. 말라야하는데 마르지 않았던 이 감사가 오늘 우리들 마음속에 흘러가야 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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