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침 묵상(98) - 자기 의가 죽지 않으면,,,,

기독교


 

채원병의 아침 묵상(98) - 자기 의가 죽지 않으면,,,,

정원교회 0 7395

누가복음 18장에는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두 사람의 비유가 나온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새인은 이렇게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이에 반해 세리는 멀리 서서, 하늘을 우러러 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했다.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바리새인들은 주님으로부터 참 지독하게도 욕을 많이 먹었지만,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모범적인 신앙인이었으며, 종교지도자로서 백성들에게서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성경말씀도 많이 알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며, 기도도 많이 하고, 평상시 삶의 모습도 흠잡을 만한 구석이 별로 없는 경건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한 가지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자기는 이렇게 경건하기 때문에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기 의로움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세리는 “나는 죄인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가슴을 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다. 세리들은 로마를 위해 동족인 유대인들에게서 세금을 징수해서 로마정부에 바치는 일을 하던 사람들이다. 우리로 말하면, 일제 식민지 시대 때 일본정부를 위해 일하는 친일파 앞잡이들에 해당이 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세리들은 세금을 징수하면서 돈을 계속 만지다 보니 비리가 많았다. 세금을 많이 걷어서 적게 바치고, 나머지는 착복하는 일이 많았다.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죄인 중의 죄인이었다.

누가 봐도, 바리새인은 흠 잡을 데 없는 경건한 사람이고, 세리는 죄인 중에 죄인이다. 경건한 자와 죄인이 대비를 통해 주님께서는 의로움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곡을 찔러 우리에게 교훈을 주신다. 주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신 사람은 경건한 바리세인이 아니라, 죄인 된 세리였다. 주님께서 의로움을 판단하신 기준은 무엇인가,,, 자기 의다. 주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을 의롭다 생각하고 높이는 자들을 멸시하시고, 자신의 죄 많음과 연약함으로 인해 마음 아파하는 자들을 의롭다 하신다. 겉으로 나타나는 경건보다 중요한 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바르게 아는 것이다.

많은 성경지식과 기도와 선교와 봉사가 자칫 자기 의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이유다. 성경을 많이 알고, 기도를 많이 하고,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일수록, 이러한 행위들이 바리세인처럼 자신의 의로움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자기 의가 죽지 않으면,,, 그 경건과 기도와 착한 일이 오히려 자신을 죽이는 독이 될 수 있다. 자칫,,, 경건한 행위와 기도와 선행이 자기 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높아 보이고, 크게 보이고, 의롭게 생각될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신앙이 성숙해지기 위해서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바로 자기 의라는 산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은 자기의 의로움이 철저하게 거부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에만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당신의 의로우심으로 나를 덮어주시는 자리,, 그 은혜의 자리가 어디인가? 십자가,, 십자가다. 이신칭의,, 죄인이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자리다. 십자가는 자기의 의로움이 부인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만 드러나는 자리다. 예수가 나의 주님이 되시는 자리다. 이것이 믿음의 기본원리요, 내용이다. 그러나 이 기본에 충실하기가 쉽지 않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이신칭의를 모르는 사람은 없어도, 예수를 주로 모시는 이신칭의의 자리로 나가는 사람은 드물다.

십자가,,, 십자가는 교만한 나의 자아가 철저하게 부서지는 자리이며, 자신의 의로움이 송두리째 뽑혀나가는 자리다. 오직 십자가 앞에서만,, 우리는 우리의 교만한 자아와 자신의 의로움을 몰아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만 나타날 수 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이신칭의는 바로 이러한 믿음이며, 이러한 의로움이다. 우리의 믿음이 이런 의로움의 열매를 맺어가는 과정을 성화라고 한다. 성화란 내가 죽어가는 과정이다. 내가 죽는 만큼, 나의 죽은 그 자리에 주님의 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이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화란 십자가라는 가장 낮은 자리로 끝없이 내려가는 과정이다. 주님께서 하늘보좌의 영광을 버리고 내려오신 가장 낮은 자리,, 그 십자가의 자리로 내려가는 사람이 참 믿음의 길을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자리는 아픈 자리다. 자기의 의가 부인되고, 자신의 전존재가 부서지고 깨져나가는 자리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절규하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성부 하나님의 독생자, 성자의 절규다,,, 하늘 아버지로부터 버림 당하시고, 땅의 백성들에게 버림 당하시는 성자 하나님의 깊고 깊은 아픔의 절규다. 하늘과 땅으로부터 버림 당하시며,, 모든 죄인들, 우리를 품으시는 사랑의 절규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픔의 절규며, 사랑의 절규다. 십자가의 아픔이 깊은 만큼, 십자가의 사랑도 깊다.

그렇다! 십자가는 가장 깊은 아픔의 자리다. 그러나 아픔보다 더 깊고 큰 사랑으로 아픔을 이겨내는 자리다. 아픔이 사랑으로 승화되는 자리다. 이신칭의의 믿음은 자신의 의로움이 부인되고, 자신의 영광이 거부되는 자리다. 자기 부인이라는 고통 가운데, 우리는 우리의 의가 되시는 우리 주님을 만날 수 있다.

십자가의 길은 고난의 길이다. 그러나 그 길은 승리의 길이며, 영광의 길이다.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강과 희락은 십자가의 자리에서 깊어지고, 풍성해진다. 그 자리는 자신의 의로움이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모든 것이 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채원병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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