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침 묵상 (101 )-세상을 보는 눈

기독교


 

채원병의 아침 묵상 (101 )-세상을 보는 눈

정원교회 0 8006


 

지난 달 27일에 법륜스님이 오클랜드를 다녀갔다. 스님은 희망세상 만들기란 이름으로 전세계 100여 나라를 순회하면서 즉문즉설 형식으로 100회 이상의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미리 준비한 강연내용을 일방적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부딪히는 삶의 여러 문제들을 질문해오면, 즉각 명쾌하게 답을 주는 방식이다.


스님은 자신의 깨달음에 근거해서 인생의 많은 문제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세상을 보는 눈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기 자신의 입장에서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문제를 볼 수 있는 상대적 시각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특히 자기 자신의 내면세계를 직시하는 통찰력이 중요시 하는 것 같다. 결국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는 문제들의 원인에 대한 깨달음이 있을 때, 문제 해결에 대한 열쇠도 찾을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스님의 유럽 방문 기사를 몇 개 읽은 적이 있는데, 한 번 강연에 약 30-40명 정도가 모인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이번 오클랜드 모임에는 500명 정도의 많은 사람이 모였다고 한다. 500명이나 모인 것도 놀랍고, 그 중에는 상당 수의 기독교인들도 있었던 것 같아 더 놀랍다.


지적인 호기심으로 참가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겠지만,,, 그만큼 삶의 문제로 힘들어하고 답답해 하는 교민들이 많다는 반증이리라. 또한 기독교인들도 삶의 여러 문제에 대해서 고민되고 궁금한 게 많은데, 교회에서 흡족한 답을 얻지 못해 스님을 찾은 것이 아닌가 한다. 스님은 질문마다 막히는 것이 없이, 즉시 시원시원하게 답을 잘 준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의 정도에 따라 다섯 가지의 단계로 나누고 있다. 가장 초보적인 단계가 육안이라고 해서 육신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는 수준이다. 다음이 심안이라고 해서 마음의 눈으로 보는 단계고, 그 다음이 혜안이라고 해서 지혜의 눈으로 보는 단계다. 혜안은 인간세상의 돌아가는 모든 원리를 깨달은 단계다. 스님은 심안이나 혜안의 경지가 아닌가 한다. 혜안 다음에는 법안이라고 해서, 우주의 모든 이치를 꿰뚫어볼 수 있는 경지다. 마지막은 불안, 즉 모든 것을 해탈한 부처의 경지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불이공, 공불이색’, 즉 우주의 모든 원리를 깨닫고, 그것조차 완전히 초월하여 비워내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단계다.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그렇다.


불교는 인생과 우주에 대한 깨달음의 종교다. 사실 종교라기 보다는 심오한 사상체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불교인이나 일반인이라면 모를까, 기독교인들이 스님을 찾아간 것은 사실 충격이다. 스님에게서 지혜로운 답변을 들을 수 있겠지만, 스님은 어디까지나 불교적 관점에서 문제를 보고, 답을 제시한다. 스님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자주 인용하는데, 실존하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로서는 아니다. 하나의 사상체계 안에서 존재하는 하나님이고, 예수님인 것이다. 여기에 문제에 접근하는 본질적인 시각의 차이가 상존한다.


기독교는 깨달음의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계시의 종교다. 인간이 신을 찾아 나서거나, 진리를 깨닫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인간세상을 향한 신의 일방적인 선포다. 그러나 그 선포는 인간과 창조세계를 향한 신의 무한한 사랑이 담겨있는 선포다. 그러기에 그 신은 우리의 하나님이실 수 있는 것이다.


그 신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절대적 주권을 행사하시며 다스리시는 성부 하나님이시다. 또한 창조세계에 대해 초월적으로 존재하시면서, 동시에 창조세계에 들어와 직접 섭리하시고 간섭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시며,,, 십자가에서 인간들의 죄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시고 부활하신 성자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종말론적 천국을 예비해 놓으셨을 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과 함께 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그들의 삶 가운데 이루어가시는 성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우리의 하나님은 관념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신이 아니라, 모든 창조의 세계와 초월적 세계와 인간들의 삶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세상을 어떤 눈으로 보아야 하는가?


첫째,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로서의 세상이다. 둘째, 인간들이 사는 모든 활동영역, 역사의 현장, 삶의 현장으로서의 세상이다. 셋째, 초월적 세계에 대비된 개념으로서의 세상이다. 넷째, 종말론적 영원불멸의 세계와 비교해서, 한시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이다. 다섯째, 불신자들의 세계로서의 세상이다. 예를 들어 주님께서 요한복음 15장에서 18,19절 등에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라고 할 때의 세상은 불신자들의 세상을 말한다. 여섯 째, 신자들의 세계로서의 세상이다. 이를 하나님의 나라라고 한다.


이와 같이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세상은 여러 모양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들은 영적 장님이다. 육신의 눈에 보이는 세상 너머 존재하는,, 이런 다양한 모양의 세상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세상에 살면서 천상의 세계를 바라보고, 오늘의 삶을 살면서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고,, 세상사람들의 사는 모습 속에서 세상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를 분별하여 볼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세상관도, 우주관도, 인생관도 다른 사람들이다. 그들은 우주와 만물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왔으며,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아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전능자의 신실하신 손이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룬 그 크신 사랑과 은혜로 자신의 삶을 굳게 붙들고 계심을 믿으며 사는 사람들이다. 모든 문제의 답을 하나님에게서 찾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신은 나의 모든 것이 되는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삶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채원병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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