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침 묵상 -예수 믿으면 행복해진다?

기독교


 

채원병의 아침 묵상 <108> -예수 믿으면 행복해진다?

정원교회 0 6473


행복,,,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의 사전적 의미는 생활에서 부족함이 없이 만족을 느끼고 기쁨을 누리는 흐뭇한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어도, 부족한 게 많고,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기쁨을 누리며 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 보니, 행복을 잘 설교하는 목회자들 인기가 높다. 미국의 레이크우드처치는 매주일 4만 3천명이 이상의 교인이 몰리는 초대형교회다. 이 교회의 담임목사인 조엘 오스틴 목사는 ‘긍정의 힘’, ‘잘되는 나’ 등으로 잘 알려진 목회자다. 행복한 인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책들이다. 

행복지상주의,, 신앙의 초점이 행복에 맞추어져 있는 행복지상주의가 널리 퍼져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순종하면 복을 주신다,,, 그러나 불순종하면 벌을 주신다,,, 맞나,, 틀리나,,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순종하면 복 받고, 불순종하면 벌을 받는다는 생각은 구약의 복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였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주로 장수와 자손의 번영, 물질의 축복 등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구약의 이러한 일반적인 복에 대한 관념을 깨뜨린 책이 욥기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다. 욥에게는 일곱 아들과 세 딸이 있었고, 소유는 넘치도록 풍족하였으며, 거느린 종도 많이 있었다. 의인 욥은 과연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예고도 없이 욥에게 불행이 덮쳐왔다. 모든 재산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열 자식까지 모두 잃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욥 자신은 온 몸에 종기가 나서 재 가운데 앉아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가장 의롭고 복 받은 사람에게 가장 큰 불행이 닥쳐온 것이다.

그러나,, 욥은 역시 의인이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고,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않겠느냐,,, 욥은 마음으로도 입술로도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았다. 큰 환란 가운데서도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으며, 그의 믿음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과연,, 욥은 당대의 의인이었다.

욥의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찾아와 욥을 위로한다. 그러나 그들의 위로는 위로가 아니라, 욥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는 고문이었다. 세 친구 중 한 명인 엘리바스의 다음 말은 그들의 생각을 잘 반영하고 있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욥 4:7) 친구들의 눈에 보기에, 욥의 고난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던 것이다. 분통이 터질 일이다,, 이제는 친구들까지 자신을 죄인 취급한다. 지상에서 가장 축복 받은 의인이 가장 저주를 받고 있다. 

그래도 욥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믿음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욥은 억울하다. 억울하고 섭섭해서 미칠 지경이다. 고난이 왜 자기와 같은 의인에게 닥치는 지,, 욥은 하나님께 묻고 싶어 한다. 드디어 하나님의 음성이 폭풍우 가운데 욥에게 들려온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요1 38:2) 하나님께서는 천지창조와 창조세계의 신비에 대해 말씀하시며, 욥을 나무라신다.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욥 40:2)자식들과 재산과 가진 모든 것을 상실하고, 아내와 친구들에게 버림 받고, 하나님조차 보이지 않는 고난 가운데서 욥은 새롭게 하나님을 만난다. 그리고 욥은 고백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5, 6)

하나님께서는 욥을 통해서 의인에게도 얼마든지 고난이 임할 수 있음을 보여주신다. 의인에 대한 축복과 죄인에 대한 징계라는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이다. 욥의 고난은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는 고난이었다. 

의인의 고난이 절정을 이룬 자리가 십자가다. 십자가는 단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믿는 자들이 통과해야 할 자리다. 주와 함께 자신의 옛 자아가 죽는 자리이며, 예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자리다. 그러나 이러한 십자가의 죽음과 새 생명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해서도 끊임없이 고백되어야 할 신앙고백이 되어야 한다. 

십자가를 통과한 자들에게 있어서 고난에 대한 이해는 명확하다. 예수의 죽음과 생명을 체험하는 자리다. 바울은 고백한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7-11) 

고난은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체험하는 자리이며,, 또한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우리 삶에 나타나는 자리다,,, 십자가의 죽음과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고 승리하는 부활의 생명력,,, 죽음에 처해지는 것 같은 고난을 뚫고 솟아나는 예수의 생명력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현재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진정한 복은 무병장수도 아니고, 부귀영화도 아니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행복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오늘날에도 구약시대의 행복지상주의가 널리 퍼져있다. 현세에서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행복지상주의는 신앙인들의 영혼을 죽이는 독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신자란 보이는 세계에 살면서, 보이지 않는 영원한 영광의 세계를 보며 사는 사람들이다.

채원병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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