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침 묵상 고정관념

기독교


 

채원병의 아침 묵상 <111> 고정관념

정원교회 0 3162


어떻게 생각하면, 하나님은 굉장히 냉정하신 분 같다. 온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정말 나의 아버지시라면,, 내가 정말 그분의 아들이고, 딸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화끈하게 쫘~악 해결해주실 수 있으실 텐데,, 하는 섭섭한 마음이 들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갑자기 은행구좌에 돈이 가득 차는 것도 아니고,, 아프던 어깨, 허리가 갑자기 사라지지도 않는다. 머리 아프게 하는 문제들도 그대로 남아있다. 

자식이 아파하고 고생하는 데 팔짱만 끼고 있을 부모가 어디 있나,,, 더군다나 도와줄 능력이 없으신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해서든 자식을 도와주려는 게 부모의 마음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녀들의 삶에 관심이 없으셔서, 자식들이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고생하는 데,,, 팔짱만 끼고 계신 걸까? 물론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근심 가운데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근심을 기쁨으로 바꾸어주시고,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삶의 문제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과 우리의 관점이 다를 뿐이다. 

요한복음 16장 16절 이하에 보면, 주님께서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근심에 사로잡히는 내용이 나온다. 아직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어쨌든 주님께서 곧 돌아가실 것이란 뜻을 알아 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근심이 가득했다. 

이별은 누구에게나 가슴 아프고 슬픈 일이다. 더군다나 그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라면, 참을 수 없는 큰 고통이 따를 수 밖에 없다. 삼 년 동안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깊고 따뜻한 사랑,,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쳐주신 귀한 말씀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수없이 많은 기적들,,, 그분께서 이제 자신들 곁을 영원히 떠나실 것을 생각하니, 제자들은 마음에 근심이 가득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근심하는 이유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아 보인다. 단지, 사랑하는 주님과의 이별만으로 슬퍼하는 것 같지가 않다. 

예를 들어, 이런 경우다. 어느 부잣집 아들이 있었다. 아버지는 큰 회사의 사장인데, 돈만 많은 게 아니라, 자식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극진히 사랑해주시고, 필요할 때는 언제나 도와주시고, 항상 따뜻하게 위로해주시고, 격려해주셨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어느 날 큰 병에 걸려 곧 돌아가시게 되었다. 자식은 자기를 그렇게 사랑해주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실 생각을 하니,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고, 이루 말할 수가 없는 큰 슬픔이 밀려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또 다른 면에서 근심이 가득했다. 어쩌면 이게 슬픔과 근심의 더 큰 이유일 지도 모르겠다. 

그 회사는 철저하게 아버지 중심으로 돌아가던 회사였다. 그래서 아버지가 없으면 회사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가정을 하자,,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가 병상에 누워 계신지 몇 달이 지나자,, 회사는 벌써 경영이 극히 어려워지고, 곧 부도날 것이란 소문이 자자했다. 아들은 아버지만 잃는 게 아니라, 잠시 후면 회사도 부도가 날 게 뻔하고,, 자기도 쪽박을 차게 된 것이다. 그러니 아들의 근심이 얼마나 컸겠는가,,, 아들의 근심은 단순히 아버지를 잃는다는 데만 있었던 게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누려왔던 모든 부귀영화가 사라지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제자들이 근심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따라다니면서,, 주님에게 아주 큰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분이 어떤 분이셨는가,, 가나 혼인잔치에서는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셨고, 유대광야에서는 작은 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부르게 먹이셨다. 또,,, 바다 위를 걸으셨고, 모든 병든 자들을 낫게 하셨고, 심지어는 죽은 지 4일이나 된 나사로라는 청년을 살려내기도 하셨다. 자기들은 이 위대하신 분을 주님으로 모시면서, 그분의 가장 측근 제자들로서, 언제나 그분과 함께 다녔다. 그러니 그 긍지가 얼마나 대단했겠는가,,,

그러나 주님을 따라 다니는 게 신나는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들판에서 노숙도 많이 하고, 고생하면서도 열심히 따라 다녔다. 그들에게는 확실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분은 정말 인간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구원자가 분명하다,, 이분은 틀림없이 이스라엘을 로마의 통치에서 구원하시고, 악한 종교지도자들을 처벌하시고,,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 되실 메시아가 분명하다,, (세례 요한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 날이 오면 우리도 왕의 신하가 되어, 그분과 함께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제자들은 이런 희망에 마음이 부풀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누가 더 큰 자인지, 지위 다툼까지 벌였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도, 그들은 이런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주님에게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하고 물었던 거다(행 1:6). 기가 막힐 노릇이다,,,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자신들 앞에 나타나셨으니, 드디어 새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구나,, 하고 기뻐했던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주님께 대해 가지고 있던 기대였다!

고정관념이라는 게 이렇게 무섭다. 이것이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구원관이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제자들과 오십보, 백보,, 거기서 거기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이니,, 뭔가 특별한 혜택이 있을 것이란 기대감을 갖고 사는 경우가 많다. 슬픈 일이나, 근심걱정은 없게 해주시고, 좋은 일, 기쁜 일만 가득하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보통 기독교인들의 고정관념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채원병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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