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위대한 입성식에 참여하라 (눅 19:28-40)

기독교


 

가장 위대한 입성식에 참여하라 (눅 19:28-40)

2천 년 전 오늘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분은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셨고,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호산나 찬송하며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이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 종려주일입니다.


국가적인 영웅을 환영할 때 하는 행사를 입성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사건 역시도 입성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입성식은 세상의 어떤 입성식보다 가장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2천 년 간 예수님은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계속 입성하셨고 지금도 입성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입성식은 세 가지 점에서 위대한데, 그를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먼저 예수님의 입성은 고난과 죽음을 향한 입성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실 장소입니다. 그런데 28절은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라고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앞서 나가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은 고난과 치욕입니다. 십자가 처형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 심리상태로 볼 때 예수님은 일행 중 맨 마지막에 들어오셔야 하는데, 맨 앞에 앞장서 가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우리에게도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즐거움이 아닌 고난이 기다리는 장소, 고통이 기다리는 장소가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괴로운 예루살렘을 예수님은 어떻게 극복하셨는가? 다름 아닌 예수님은 그것을 직면하셨습니다. 이 직면이야말로 예루살렘을 이길 수 있는 비결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처럼 인생의 어려움 앞에서 도망치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직면하는 자세가 필요할 줄 믿습니다.


2. 예수님의 입성은 겸손과 평화의 입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입성식이 세상과 다른 점은 세상의 입성식이 입성하는 자의 위엄과 기세를 떨치는 것이라면, 예수님은 겸손의 왕이요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것이 그 증거입니다.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두 가지 은혜가 있습니다.


1)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철저하게 성취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가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의 언약과 말씀이 하나도 빠짐없이 다 성취되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520년 전에 스가랴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스가랴 9:9)” 예수님은 이 언약을 알고 계셨을 뿐 아니라 분명히 이루어질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성에 들어가실 때 예수님에게는 나귀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질 것을 믿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9-31절에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자세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받았고, 또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믿음으로 그 말씀을 내 삶에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언약의 말씀은 선포하면 능력이 되고 선포해야 기적이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니 32-34절에 나귀새끼를 얻었습니다.


2)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것은 겸손의 왕으로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롬 12:16절은 겸손을 잘 설명하기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라고 설명합니다. 이 중에서 겸손의 핵심 의미를 뽑으면 겸손은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낮은 데 처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지만, 하나님이 예수님을 위해 준비해주신 것은 새끼나귀였습니다. 그 위에 어른이 타면 발이 질질 끌리는 그런 나귀입니다. 원래, 입성식 때 말에 타는 것은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위엄 있게 보이라고 타는 건데 예수님의 새끼 나귀는 오히려 사람들을 올려다봐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귀 새끼를 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건데도 푸대접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이와 같을 때 우리는 멋진 군마가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고 겸손히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합니다. 오늘 내게 주어진 위치, 내게 주어진 자리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을 감사함으로 겸허히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3. 예수님의 입성은 부활을 향한 입성이었습니다.


비록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셨지만 예수님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굉장히 은혜가 됩니다. 그들은 36절 보면, 먼저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위에 깔고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도 자기들의 겉옷을 폈습니다. 또한 그들은 승리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환호했습니다. 거기다가 37-38절을 보면 제자의 온 무리가 기뻐하며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라고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행동과 분위기는 지금 성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입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의 입성은 죽임을 당하러 가는 입성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마음에는 슬픔과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런 예수님의 마음을 알았는지 39절에 말하기를 당신 제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책망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40절에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라고 답합니다. 즉 그들의 환호와 기쁨과 찬양이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록 죽음을 당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지만 사람들이 애곡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예수님의 이 여정은 고난과 죽음을 향해 가지만 결코 예수님의 걸음은 고난과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끝에는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길 끝에 부활이 있기 때문에 슬픔과 애곡을 하는 게 아니라 기뻐하고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내가 비록 지금은 고난과 죽음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라도 이 길의 끝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나를 사랑하시고 나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멈추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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