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알면 신앙이 즐거워집니다 광림교회정존수 목사

기독교


 

은혜를 알면 신앙이 즐거워집니다<눅 7:36-50> 광림교회정존수 목사

음식 중에서, 어렸을 때는 입에도 못 대다가 나이가 들면 비로소 먹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파가 그 좋은 예입니다. 국에 파가 들어가면, 아이들은 대개 이 파를 다 건져냅니다. 왜냐하면 파의 그 향이 아이들에겐 너무 참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은 음식에 파가 있으면 정색을 하고, 어른들을 이해 못합니다. 어른들이 그걸 먹는 것도 이해 못하고 그걸 자꾸 먹으라는 건 더더욱 이해 못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면, 어느 순간 그 파의 맛을 알 때가 옵니다. 여러분, 한국은 치킨 종류가 많은데 그 중에 파 닭이란 걸 먹어 본 적이 있습니다. 후라이드 치킨에 파를 얹어 먹는 건데, 정말 파와 닭고기의 조화가 기가 막힙니다. 그걸 먹으면 사람들은, 아 파 맛이 이렇게 좋은 거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음식은 그 맛을 알면 그 때부터 그 음식이 즐거워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맛을 알면 그 음식이 즐거움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도 맛을 모르면 신앙이 즐겁지 않습니다. 그러나 맛을 알면 이 신앙이 즐거운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즐겁고 행복한 신앙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세 가지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예수님을 마음에 모실 때 신앙이 즐거워집니다.


오늘 본문은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청하는 이야기입니다. 바리새인의 이름은 40절에 보니까 시몬입니다. 바리새인은 보통 예수님을 싫어했는데, 그는 정중하게 초대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고, 또 그을 만났지만 그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오셨는데 그에게 어떤 변화도, 어떤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반드시 변화가 일어나고 역사가 일어났는데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는 예수님을 초대했지만, 사실은 초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 마음에 모셔 들이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44-46절에서 하신 예수님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말인즉, 너는 나를 초대했지만 실상은 나를 초대한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들이고, 예수님과 육신적으로 같은 공간에 있을지라도 예수님을 내 마음에 참 구주로 모셔 들이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죠. 예배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임하시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열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내 마음에 모시지 못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열어 주님을 모시는 게 그렇게 중요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 생활할 때 예수님 한 분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꼭 만나시길 바랍니다. 나아가 예수님을 내 마음에 꼭 모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기쁨이 충만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2. 받은 은혜가 크면 헌신도 큽니다.


본문에 보면, 또 하나의 이상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누군가 하면 한 여인인데, 37절에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설명합니다. 한 마디로 이 여자는 동네 사람들이면 누구나 다 아는 죄인입니다. 이 여자는 정말 이해하기가 힘든 행동을 하는데, 시몬이 예수님을 초청하여 식사하는 자리에 향유가 담긴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 곁으로 와서는 정신없이 흐느껴 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물이 예수님 발에 뚝뚝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자기의 머리를 풀어서는 그 발을 닦고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붓는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보고 시몬은 39절에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라고 생각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여자가 와서 이런 행동을 하는데도 이 여자가 죄인인 걸 모른다면, 이 사람은 선지자가 아니구나.’라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시몬을 알고 그에게 설명하십니다. 40절에 “예수님께서 시몬아 내게 해 줄 말이 있다. 빚진 사람이 둘이 있는데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졌고, 다른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그런데 채주가 그 둘을 다 탕감을 해 주었다면, 누가 더 감사하겠느냐?” 시몬이 말하길 “당연히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죠.” “그렇다면 이 여자가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 아니? 이 여자는 네가 아는 대로 죄가 많은데, 그 많은 죄를 사함 받았기 때문이다.” 47절 보세요.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죄 많은 여인이 자신의 귀한 것을 다 쏟은 것은 받은 은혜가 너무 크고 많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 안에도 이 여인과 같은 자들이 많습니다. 어떤 교우는 교회를 위해서 자기의 귀한 것을 드려 헌신합니다. 눈물을 쏟아 기도함으로 헌신합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은 받은 은혜가 크기에 헌신도 큰 것입니다.


3. 헌신은 또 다른 차원의 은혜를 여는 열쇠입니다.


오늘 여인이 보여준 행동은 헌신 그 자체입니다. 그녀는 자기의 귀한 향유 옥합을 쏟았습니다. 그런데 향유만 쏟은 게 아니고 눈물도 쏟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머리를 풀어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여인의 행동은 완전한 헌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은혜는 이 헌신이 또 다른 은혜를 열더라는 것입니다. 48절에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뭐라고 축복하는가 하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여인의 문제는 공인된 죄인이라는데 있었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 여인을 가리켜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예수님께서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여인의 온전한 믿음이 헌신으로 나타났고 그 헌신은 그녀가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차원의 은혜의 문을 연 것입니다. 믿음이 헌신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 받은 은혜가 크다면 여인처럼 주님께 나를 드리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새로운 차원의 은혜가 열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나의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님께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은혜에 머물면 안 됩니다. 그 은혜를 가지고 본문의 여인과 같이 헌신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헌신할 때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차원의 은혜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헌신은 새로운 차원의 은혜의 문을 여는 열쇠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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