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침 묵상 그리스도와의 연합

기독교


 

채원병의 아침 묵상 <136 > 그리스도와의 연합

정원교회 0 1697

요한복음 17장은 주님께서 십자가의 대 사명을 눈 앞에 두시고, 이 세상에 남아있게 될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께 드린 기도의 내용이다. 사람도 죽음을 앞두고 유언을 할 때는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꼭 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게 된다. 주님의 유언적 기도는 ‘그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라는 사실을 기본전제로 하고 있다. 이제 곧 세상을 떠나시지만, 아직 세상에 남아있게 될 제자들을 위한 기도,, 그 기도는 곧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기독교인들도 위한 것이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 예수를 영접하고 기독교신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가 되는 것이다. 세상과 상관이 없는 자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살아가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기독교신자이고, 그들의 모임인 신앙공동체가 교회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란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뜻이고, 하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난 자들을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났다는 말은 십자가에서 다시 태어났다는 말과 같다. 왜냐하면, 그들은 십자가에서 ‘세상에 속했던 내’가 죽고,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나’로 다시 태어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 2:20에서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 바울의 이 고백 안에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가 명료하게 담겨있다.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자신 안에 살아계심을 믿는 자들,, 그들이 기독교신자들이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도 예수님께서 자신 안에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실제로 느끼며 살기가 쉽지 않다. 막연히 그러려니 생각하거나, 지식적으로는 받아들이지만, 마음으로 느끼기란 쉽지 않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고백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박혔다,,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님이 되셔서 나를 다스리시는 사람들,,, 그들이 참된 기독교신자들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죽어야 한다. 그래서 잘 죽을 줄 아는 사람이 잘 믿는 사람이고 믿음이 좋은 사람이다. 주님께서 자기 자신 안에 살아계신 것을 잘 느끼지 못한다면, 아직 제대로 죽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한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서는 단지 예수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내가 죽는 자리에까지 나갈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죽을 때 비로소 주님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시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주님께서 믿는 자들 안에 들어와서 함께 살게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그들의 신랑이 되시고, 그들은 그분의 신부가 되어 둘이 꼭 붙어서 뗄래야 뗄 수가 없는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것을 신학적 용어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요 15:5,6에서 포도나무와 가지에 비유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5-6)

예수를 믿어도 삶이 드라이하고, 짜증나고, 마음 속에 불만과 불안이 가득하다면,, 아직 제대로 죽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예수님을 마음 속에 제대로 모시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성적으로는 예수를 구원의 주로 인정하긴 하는데, 아직 예수가 그 마음 안에 자리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 주께서는 주 안에 거하지 않으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른다고 하셨다.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어야 열매를 맺는 것처럼, 예수님께 붙어있어야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다. 주께서는 포도나무의 열매에 비유하셨다,, 포도나무의 열매,, 포도가 어떻게 열리는가,, 한두 개만 달랑 열리는 게 아니라,, 다발로 주렁주렁 열린다. 예수님께 붙어있는 자, 즉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이처럼 풍성한 은혜를 체험하며 살게 된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모시고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이때 교회의 지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십자가의 사랑이다.  십자가의 사랑을 받고 십자가에서 다시 태어난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들은 단지 십자가의 사랑을 찬양하는 자들이 아니라,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자기 몸을 내어주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사랑으로 살아가십시오(엡 5:12〔표준새번역〕)십자가의 사랑은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이다. 십자가의 사랑은 내가 죽을 때, 비로소 가능한 사랑이다. 내가 죽을 때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 것처럼, 내가 죽을 때 내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앙인들이 추구해야 할 삶의 모습이다.

채원병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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