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침 묵상 누구를 위한 집인가

기독교


 

채원병의 아침 묵상 <138> 누구를 위한 집인가

정원교회 0 2417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2장에서 천국잔치를 왕실 혼인잔치에 비유해서 설명하셨다. 임금이 잔치에 초대되어 들어와 있는 사람들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보고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고는, 사환들에게 명한다.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비유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자란 천국잔치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에 어울리는 예복을 입어야 하는 것처럼, 천국잔치에 참여하는 사람은 천국잔치에 어울리는 예복을 입어야 한다. 여기서 예복이란 천국잔치에 어울리는 행실과 삶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처음 초대 받은 자들은 오기를 거부하고, 임금이 보낸 종들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하였다. 임금은 노하여 군대를 보내 살인자들을 진멸하고, 닥치는 대로 만나는 사람들을 잔치에 청하였다.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잔치에 손님이 가득한지라”(마 22:10) 

천국,,, 악한 자나 선한 자나 차별 없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예복은 입어야 한다. 그들의 과거의 삶이 어땠든, 과거는 묻지 않으신다. 허지만 그들이 현재 입고 있는 의복은 추궁하신다. 천국 잔치에 참여한 자들은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다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천국잔치 비유는 이렇게 끝이 난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천국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은 많지만, 그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은 적다,,, 무시무시하다,, 여기에 구원의 심각성이 있다. 잔치에 청함을 받고도 택함을 입지 못할 수 있다,, 그것도 청함을 받은 많은 사람 중에 소수만 택함을 받는다,,, 게다가 판단 기준이 예복을 입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예복은 행위를 상징한다. 

뭔가 이상하다??? 예수를 구원의 주로 믿으면 구원받는 것 아닌가? 마치 의로운 행위를 통해 구원받는 것처럼 들린다. 주님의 비유는 무슨 뜻일까? 믿음만으로는 안 되고,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뜻인가?? 

구원받을만한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강조점은 구원받은 자는 구원받은 자답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의 믿음이 참 믿음인지를 확증하여야 한다. 이 때 구원의 증거가 되는 것이 삶의 열매다. 삶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된다. 그러나 그 믿음은 행함이 따르는 믿음, 삶으로 결실되는 믿음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한다.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 2:26) 

믿음, 믿음 하는데,, 그 믿음이 무엇인가?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참 믿음이다,,,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행할 것인가,,, 주일성수 잘 하고, 십일조 잘 내고, 주방봉사 열심히 하고, 여러 가지 교회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한다면, 이 사람의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인가?

둘 다 가능하다. 행함이 있는 믿음일 수도 있고, 행함이 없는 믿음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서 한 행동인가이다. 주께서는 마태복음 7장 21-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주의 이름으로 아무리 큰 일을 하여도 마지막 날에 버림받을 수가 있다,,, 믿음과 구원이 너무 가볍게 여겨지고 있다. 싸구려 은혜와 구멍 난 복음이 널리 퍼져있다. 주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이에 대한 보충설명으로 바르게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해서 설명하셨다.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치니, 무너졌다. 그리고 그 무너짐이 엄청났다. (마 7:24-27절[표준새변역])

주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과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 행위가 초점인 것 같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행위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집을 열심히 지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었고, 한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었다. 두 사람 다 집을 짓는 행위에 있어서는 다를 바가 없다. 어디에 지었느냐가 중요하다. 

주님께서는 누가 더 큰 집을 지었느냐를 따지지 않으시고, 어디에 집을 지었느냐를 말씀하셨다. 중요한 것은 큰 집을 지었느냐 작은 집을 지었느냐가 아니라, 어느 기초 위에 집을 지었느냐 하는 것이다. 초점은 집에 있지 않고 기초에 있다. 집을 짓는 행위에 있지 않고, 어디에 집을 지었느냐 하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다.

집을 짓되 예수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집을 지어야 한다. 주의 이름으로 큰 일을 하고도 마지막 날에 버림 받는 자들이 있다. 누구를 위한 집인가가 중요하다. 주를 위한 집인가, 자신을 위한 집인가? 

채원병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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